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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에스겔 22:23~31)

  • 박재역
  • 2024.01.22 오전 05:50

복 있는 사람의 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복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 말씀이 새겨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복 없는 사람의 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립니다. 복 없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이 될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귀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 내리는 은총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는 한 분 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이리저리 세상 조류에 휩쓸려 다니는 사람 되지 말고 언제나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시절을 쫓아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말씀 잘 들어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여러분이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아는 만큼 해석할 수 있고, 아는 만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성경을 주일마다 듣고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 때 우리가 오늘 듣고 배우는 이 말씀이 성경 전체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말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고 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을 조금만 공부합시다.

구약성경의 구분입니다. 구약성경은 크게 율법서,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법서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말씀입니다. 모세오경, 토라라고도 합니다. 이 율법서에는 우주의 기원, 인류의 기원 그리고 언약백성 신앙의 기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를 역사서로 구분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시가서로 분류합니다. 시와 노래로 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만난 하나님, 현재 우리와 함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시와 노래로 찬양하고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선지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신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하신 말씀,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시고 들려주신 말씀이 선지서입니다. 이 선지서는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 구분합니다. 말씀의 분량이 많으면 대선지서, 말씀의 분량이 적으면 소선지서로 구분합니다. 대선지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분량이 작아도 예레미야서와 함께 대선지서로 구분합니다. 그러면 대선지서는 5권이 됩니다. 소선지서는 12권입니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계, 스가랴, 말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겔 말씀을 읽었습니다. 에스겔 말씀은 대선지서에 해당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사야, 예레미야보다는 후대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에스겔 선지자는 다니엘보다는 조금 앞선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로 대선지서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선지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선지서를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려면 이 연대표를 꼭 알아야 합니다.

계속 반복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쳐드린 연대인데요, 오늘 아예 외우시기 바랍니다. 유다 나라가 바벨론 제국에 망하고 유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바벨론 땅으로 포로로 끌려갔는데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1차 바벨론 포로는 BC 605년경에 이뤄졌습니다. 이때 왕족과 귀족이 먼저 끌려갔어요. 그때 대표적인 인물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있었어요. 왕족과 귀족을 먼저 볼모로 잡아간 거예요.

그다음 2차로 바벨론 땅에 또 포로로 끌려갔는데 BC 597년입니다. 그때는 쓸 만한 사람들, 기술자들, 학자들 같은 바벨론 땅에 데리고 가면 쓸모가 있겠다고 판단한 그런 사람들을 끌고 갔어요. 2차로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 중에 대표적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에스겔서를 기록하고 선포한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이 2차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3차로 BC 586년에 바벨론 제국이 침입을 해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합니다. 성전을 불태우고, 성벽을 무너뜨리고 거의 모든 백성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고 가버렸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사람들만 남겨두고 다 끌고 갔습니다. 그것이 BC 586년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BC 597년에 2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사람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BC 593년부터 BC 571년까지 선지자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나이 25세에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갔는데요, 나이 30이 되어야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어서 기다렸다가 나이 30이 되면서부터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와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위로의 말씀, 소망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에스겔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자기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자기도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지만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힘과 능력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땅에서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유다 백성들을 강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 시대의 에스겔이 되어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강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시대의 에스겔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눈물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살아가는 예루살렘 사람들, 유다 백성들에게 이 에스겔 선지자는 강하게 힘을 불어넣는 사명을 받았고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먼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힘과 권세를 공급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땅의 고통 중에 살아가는 유다 백성들을 강하게 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많은 에스겔이 필요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이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나의 속사람을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다음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을 강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이 먼저 만나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먼저 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을 강하게 만드십시오. 이 힘들고 험한 세상 헤쳐 나가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강한 믿음의 용사로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힘들고 험한 세상 속에서 가정을 지키려고 열심을 내고 있는 여러분의 가장, 여러분 남편을 강하게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강하게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도 강하게 하는 오늘 이 시대의 에스겔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 되지 말고, 옆에 있는 사람을 시들시들하게 만드는 사람 되지 말고, 옆에 있는 사람 마음에 상처 주어서 낙심하게 하는 사람 되지 말고, 곁에 있는 사람을 강하게 하는 사람, 곁에 있는 사람을 강한 믿음의 용사로 세울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 에스겔 2222절과 31절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의 특별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를 쏟아 부으신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분노를 쏟아 부으시는 것이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분노를 쏟아 부으시면 멸망하고 심판이 임한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에게 분노를 쏟아 부으실까요? 왜 사람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일까요? 유다 나라는 왜 망했을까요?

 

첫째 이유는 에스겔 2218절에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읽읍시다.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내게 찌꺼기가 되었나니 곧 풀무 불 가운데에 있는 놋이나 주석이나 쇠나 납이며 은의 찌꺼기로다.”

찌꺼기 같은 사람이 많아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쏟아 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남쪽 유다 나라가 왜 망했는지, 예루살렘이 왜 망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찌꺼기같이 되었기 때문이라, 예루살렘이 찌꺼기같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남쪽 유다 나라도 이스라엘로 통칭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왜 망했나 하면 찌꺼기 같은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찌꺼기 같은 사람이냐?’, ‘어떤 사람이 망하게 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22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네 가운데에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에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에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

부모를 업신여기는 사람이 찌꺼기 같은 사람입니다. 먼저 부모가 부모다워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혹 약할지라도, 혹 부모에게 허물이 있을지라도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다. 부모를 업신여기고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 찌꺼기 같은 사람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해야 하는데, 나그네를 대접할 줄 모르고 힘없는 나그네라고 압제하고 학대하는 사람이 찌꺼기 같은 사람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보살필 줄 알아야 하는데 고아와 과부, 힘없는 사람이라고 도리어 착취하고 해치는 사람이 찌꺼기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위에는 하나님께서 분노를 쏟아 부으십니다. 그것이 심판입니다. 부모를 업신여기는 사람, 나그네를 대접할 줄 모르고 학대하는 사람,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람이 못난 사람, 찌꺼기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찌꺼기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분노를 쏟아 부으세요. 그것이 심판입니다. 왜 유다 예루살렘이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망했나? 하나님 앞에 찌꺼기같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놋이나 은이나 납이나 찌꺼기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합니다.

 

에스겔 228절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하나님의 성물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의 성소, 성전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행합니다. 하나님을 더럽혀요. 안식일을 더럽혀요. 하나님의 율법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찌꺼기 같은 사람들입니다. 찌꺼기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쏟아 부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분노를 쏟아 부으십니다. 그것이 심판입니다.

 

에스겔 229절도 같이 읽읍시다.

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음행하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음행하는 자도 있었으며 피를 흘리려고 이간하는 사람들이 찌꺼기 같은 사람들입니다. 늘 싸움 붙이고, 서로 이간질하고, 사람들 다투게 만드는 사람을 성경은 찌꺼기 같은 사람들이라 표현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분노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교회 안에 찌꺼기 같은 사람이 있으면 안 되는데, 구역 식구들 싸움 붙이고 이간질하고 그런 사람이 구역 안에 있으면 그 찌꺼기 같은 사람 때문에 구역이 힘들어져요. 전도회원 중에 이간질하고 싸움 붙이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가 임합니다. 전도회가 힘들어집니다. 교회 안에 서로 이간질하고 싸움 붙이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됩니다.

정치인 중에도 우리가 걸러내야 합니다. 이념 논리, 진영 논쟁, 좌파 우파로 국민을 갈라치기 해서 그 사이에 자기 자리 하나 만들어 보려고 하는 나쁜 사람들, 이제는 국민이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그런 사람 걸러내야 합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니에요. 우리는 무엇입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우리가 하나 되는 거예요. 부족한 건 서로 용납하고 함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우리의 소원이지 좌파를 실현하는 것도, 우파를 실현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제 곧 총선이 있는데, 여러분 교회 안에서는 정치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 싸움 붙이고 갈라치기 하는 사람을 성경은 찌꺼기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앞으로 그런 정치인에게 표를 주면 안 됩니다.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꿈과 비전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아서 그런 사람에게 표를 줘야 할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왜 망했나 하면 모든 높은 산에서는 우상 숭배했어요.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는 음란죄를 범했습니다. 찌꺼기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도 하나님께서 분노를 쏟아 부으시므로 앗수르 제국에 망했고, 남쪽 유다도 하나님께서 분노를 쏟아 부으시므로 바벨론 제국에 망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도 여러분도 우리는 찌꺼기 같은 사람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보배로운 사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찌꺼기 같은 사람 되면 나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가 쏟아 부어져요. 그러면 안 되지요. 내가 보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강하게 하는 사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 넘어진 사람도 일으켜 세우는 사람, 우리 그런 사람으로만 살아야 될 것입니다.

에스겔 22장에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유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분노를 쏟아 부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하나 더 나옵니다. 둘째 이유가 에스겔 2230절과 31절에 있습니다. 우리 같이 읽읍시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설 사람을 찾고 계셨는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설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분노를 쏟아 부으실 수밖에 없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한 번만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한 번만 더 긍휼을 베푸시고 진노를 거둬들이시옵소서.”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 이 땅에 한 번 더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렇게 막아서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기를 간절히 간구하던 사람이 어디 있는지 하나님께서 찾으셨답니다. 찾고 찾으셨는데 그런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은 분노를 쏟아 부으실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언제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채찍질하면서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 한 번만 더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이 땅에 하나님 한 번만 더 은총을 베푸셔서 이 민족이 넘어지지 않도록, 주여 긍휼을 베푸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그렇게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할 사람을 하나님이 찾고 찾으셨는데 그런 사람 못 찾았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망한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미숙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합니다. 아직 믿음이 어리고 신앙의 초보에 있는 사람들은 기도할 게 없대요. 자기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나면 기도할 게 없대요. 아직 신앙이 어리고 미숙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보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가 더 뜨겁습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뜨거운 눈물이 흘러요. 자기를 위해서 아닌 교회를 위해서,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 기도가 더 간절해집니다.

지금 항암 치료 중인 누구누구가 있습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눈물이 흘러요. 지금 사업이 어려운 누구누구가 있습니다.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고 기도가 더 간절해져요. 믿음이 성장하면 내 기도 속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자꾸만 더 많이 포함됩니다. 아직 신앙이 어리고 미숙하며 신앙의 초보 단계에 있으면 자기 가족 이름 외에는 기도 제목 속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아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을 강구할 줄 아는 오늘 이 시대의 믿음의 용사, 오늘 이 시대 이 세상에 믿음의 용사, 거룩한 에스겔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설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전에는 제가 다른 교회를 방문해서 보면 참 새로운 것이 많았어요. 이전의 웬만한 교회에는 중보기도실이 다 있었어요. 기도함 속에 누군가가 기도 제목을 넣어요. ‘우리 아들이 이러이러한 기도 제목이 필요합니다.’, ‘우리 형님이 지금 암에 걸려서 이렇게 힘들어할 때 기도하시는 분들이 좀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중보기도함에 기도 제목이 있으면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믿음의 백성이니까 기도 제목을 들고서 간절히 기도해 줬어요.

우리 한국 교회가 중보기도를 뜨겁게 올릴 때 굉장한 믿음의 자산이었어요. 굉장한 믿음의 재산이었다고요.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몇 년 전 우리 교단에서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결의했습니다. 총회의 의도는 옳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밖에 없는데 자칫 잘못하면 기도 좀 한다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는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교단에서는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니까,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사용할 수 없다고 결의했습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예수님 외에는 어떤 중보자도 없습니다. 이게 복음의 핵심이니까. 그 복음의 핵심을 지키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님 외에 어떤 중보자가 있다는 조금의 뉘앙스라도 용납하지 않겠다. 그래서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쓰지 말자라고 결의했는데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누가 어떤 의미로 많이 사용하느냐에 따라 용어의 의미가 다르게 정의돼요. 말이라는 것은 누가, 어떤 사람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새롭게 정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속 좁은 하나님이 아니신데, 왜 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제 마음속에는 지금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의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중보기도란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여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기도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려 주고 더 열심히 기도하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아쉬운 마음이 있어요.

중보기도란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여 이웃을 위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이웃 사랑 실천 기도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우리 교단에서는 이런 의미로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라고 이야기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도록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쓰지 말고 도고기도라 하라, 그런데 이게 뭔 말인지요? 이웃 사랑 실천 기도라 하라? 이전에 중보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조금 뒤로 퇴보한 듯한 느낌이 있어서 굉장히 속상해요. 무엇보다도 과거에 비해서 기도의 열기가 식었다는 점이 속상한 거예요. 지금 기도 열기가 식어버린 것이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쉬워요. 다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한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부짖으며 기도한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가 다시 기도를 회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무너지지 않도록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이 찾고 찾으시는 그런 사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매우 중요하고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한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여러분의 기도가 더 뜨거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그렇게 믿음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에는 기도팀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도하는 기도팀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예배를 위해서, 여러분의 하나님 말씀 잘 새겨듣고 성령 충만함을 받도록 지금도 기도하는 기도팀이 있어요. 우리 교회 보배 같은 분들입니다. 화요일에도 오전 1030분에 어머니기도회로 모여서 기도하는 기도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보배 같은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할 수만 있으면 기도의 자리에 나오셔서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기도의 용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새벽에도 나오셔서 기도하시고, 금요일 저녁에도 시간이 되는 대로 나오셔서 함께 부르짖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이여,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이 땅 가운데 다시 한번 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심판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보배로운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찾으셨대요. 예루살렘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이여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사람을 찾으셨답니다. 그런데 없었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 분노를 쏟아 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을 즐기는 분이 아니에요. 살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어들이시고 분노를 거두어들이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다시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로 여러분이 오늘 이 시대의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사람,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가정이 무너져 가는 곳이 있다면 거기를 막아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부모님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막아서서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부르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이 힘들고 험한 세상 속에서 이 세상 조류에 휩쓸려 무너지지 않도록 여러분 자녀들을 위해서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는 믿음의 부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새해 들어서 지구촌 곳곳에 전쟁의 소문이 너무 쉽게 들립니다. 무슨 미사일로 공격했다, 어디로 무슨 폭격기로 폭격을 했다, 너무 쉽게 돌려요. 이러면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합니까? 어떤 경우에도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역사는 반복되는 성향이 있다는 거예요. ‘설마 전쟁이 일어나겠어?’ 우리 그런 생각 거두어들이고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설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데 이 한반도 땅의 평화가 언제나 지켜지도록,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 나라 백성들이 슬픈 백성이 되는 거예요. 얼마나 고도화된 무기가 많은지 몰라요. 한 번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요. 누가 죽을까요? 이 나라 백성들이 죽는 거예요. 이 땅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에도, 후손의 세대에도 우리 주님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여러분 깨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가정에 삼 남매가 있었대요. 막내가 다섯 살짜리로 아주 말썽꾸러기입니다. 고집불통이죠. 말을 잘 안 들어요. 그 위에 한 살 차이로 여섯 살짜리 둘째딸이 있었어요. 이 다섯 살 막내 때문에 너무 속상하고 날마다 기분이 나빠요. 그 위로 여덟 살 된 큰딸이 있었대요. 하루는 이 막내아들이 얼마나 말썽을 피우는지 아빠가 화가 많이 났어요. 그러니까 이때다 하고 둘째딸이 몽둥이를 얼른 찾아 와서 아빠, 여기 있어요. 막내 좀 혼내주세요.” 그랬다는 거죠. 그러니까 여덟 살 된 큰딸이 와서는 얼른 아버지 앞을 가로막고 아빠, 이 막내 동생 아직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내가 잘 보살필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삼남매를 품에 꼭 안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우리 신앙의 수준은 지금 어느 정도입니까? 말썽만 피우고 문제만 일으키는 다섯 살 난 막내아들의 수준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여러분 여섯 살 난 둘째딸입니까? 몽둥이 찾아와서 내 동생 말썽 자꾸 피우니까 때려주세요. 혹시 그 수준의 인격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어느 수준에서 살고 계신가요? 동생 용서해 주세요. 내가 잘 보살필게요. 그 정도의 수준은 됩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서서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게 하고 무너져 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용사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오늘 이 시대의 에스겔이 됩시다. 강하게 하는 사람 됩시다. 먼저 강하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내가 먼저 만납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권능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내 가족 식구들, 내 이웃들, 이 나라 이 민족까지 다시 강하게 만들어 세우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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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에스겔 22:23~31)
  • 2024-01-22
  • 박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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