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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태복음 1:18~25)

  • 박재역
  • 2024.05.20 오전 06:34

구약의 율법은 신약의 복음을 바라보게 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습니다. 율법으로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율법 아래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구약은 옛 언약인데 예속언약이라 표현하고 신약은 새 언약인데 자유언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죄 없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보혈의 값으로 우리의 죄를 단번에 대속하셨습니다. 죄 없는 보혈을 흘려 우리의 죄를 단번에 대속하시는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시고 율법의 마침이 되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이제 복음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신약은 새 언약인데 자유언약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구약의 그리스도와 신약의 그리스도는 같은 분입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와 또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실체는 동일합니다. 구약의 율법시대는 세례 요한의 때까지이고 신약의 복음시대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입니다.

실체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경륜은 다양합니다. 구약은 율법과 성막, 제사의 규례로 이 세상에 오실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서 드려지던 모든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제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리스도를 희미한 형상과 그림자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칼빈은 구약은 옛 언약인데 율법의 희미한 경륜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준다고 표현했습니다. 신약은 사람의 형상으로 몸소 오신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신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최후의 만찬을 드실 때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다하시고 잔을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제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단번에 완전히 대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신약은 이렇게 실제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칼빈은 신약은 새 언약인데 복음의 명료한 경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역사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BC(Before Christ, 비포 크라이스트) ,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을 옛 시대라고 하고, AD(Anno Domini, 안노 도미니) , 주님이 오신 해로부터 신약시대라고, 새 시대라고 역사도 그렇게 구분됩니다. 사람은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야 새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항상 예수님이 계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는 어떤 교회가 참교회일까요? 교회 주인의 자리 중심에 예수님이 계신 그런 교회가 참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교회는 참교회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중심에 계신 교회, 주님의 교회가 참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나라는 어떤 나라가 복 받은 나라일까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백성들이 있는 나라,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나라와 민족이 복 받은 나라, 복 받은 민족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나라. 복 받은 나라 복 받은 민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신약 성경으로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11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신약성경의 첫 구절은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과 차이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신약은 구약의 연결인 동시에 새로운 차별성이 부여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육신의 혈통으로 메시야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사실은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므로 이제 은혜시대가 열렸다는 점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차별성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한 메시야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의 첫 구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한 메시야 바로 그분이시다. 이것을 신약성경의 첫 구절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심으로 새 시대가 열렸다. 복음시대, 은혜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2절 말씀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불러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100세예요. 자기 힘으로는 낳을 수 없는 아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되는데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시고 야곱의 아들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십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데 야곱의 아들 중에 레위 후손은 제사장 가문이 되고 요셉에게 두 몫을 허락하셔서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각각 이스라엘의 지파를 이루게 됐지요. 야곱이 특히 축복하기를 야곱의 아들 중에서 유다가 형제의 찬송이 된다고 축복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라고 축복하고 예언했는데,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야곱은 아들이 많은데, 마태복음 12절엔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절부터 6절까지 좀 긴 본문이지만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낳고 또 낳고 낳고 기록이 돼 있죠. 성경이 무슨 낳고 이런 것만 기록하고 있나 그런 생각 드시는 분 있을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기록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역사입니다. 야곱의 아들 중에서 유다가 형제의 찬송이 되고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고 축복했는데 실제로 세월에 흘러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다윗 왕이 나고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 드디어 메시야 그분이 오셨으니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태는 그 사실을 힘주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중하고 중요한 역사를 기록하면서 마태는 조금도 가감 없이 진실하고 정직하게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 예수님의 계보, 메시야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여인들의 이름을 가감 없이 있었던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례에 따르면 족보에 여인들의 이름은 올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5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다말, 라합, ,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 이렇게 5명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분들은 용기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결단성이 있는 분들이었어요. 그렇지만 이분들의 신분과 정황을 살펴보면 굳이 드러내어 자랑할 만한 분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이름을 성경은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다말은 누구일까요? 다말은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인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다말은 남편이 죽고 대를 이을 방법이 없게 되자 창녀로 분장합니다. 그리고 양털 깎으러 가는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후대를 잇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죠. 오늘날 역사를 기록한다면, 숨기고 싶은 역사입니다. 아니면 살짝 고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숨기고 싶은 역사인데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계대결혼이라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부끄러운 일이에요. 유다가 창녀인 줄로 알고 여인을 품었다 해도 창녀에게 다가갔다는 것 자체가 부도덕하기는 마찬가지잖아요. 이건 숨겨야 하는 이야기, 숨겨야 할 스토리인데 마태는 이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 중 베레스는 정상적인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거 드러내어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닌 거예요. 그런데 다말과 시아버지 유다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의 이름을 예수님의 족보에 그대로 밝혀 놓고 있습니다. 마태 보면 13절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이건 기록 안 해도 되잖아요. 다른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기록 안 하거든요. 그런데 굳이 다말에게서이렇게 기록해요. 부끄러운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어 오히려 들추어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라합은 누구입니까?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이라고 표현하지만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창녀입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어요. 이 기생 라합이 다윗 왕의 고조할머니가 돼요. 아합은 가나안 여인으로 창녀였습니다. 아합이 용감하게 하나님 편에 섰다는 사실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녀가 가나안 출신의 창녀였다는 사실으 숨기고 싶은 일이지 드러내어 밝히고 싶은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5절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이 사실을 밝히고 있어요. 굳이 이렇게 기록 안 해도 되는데 라합에게서를 빼버리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이렇게 기록해도 될 텐데 굳이 라합에게서넣어 부끄러운 부분을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룻은 누굽니까? 룻은 참 대단한 여인이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극 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던 귀한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룻은 이방 여인, 모압 여인입니다. 모압 사람은 부끄러운 조상의 후손들이라 하나님의 총회에 영원토록 못 들어온다고 저주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모압의 후손 룻을 예수님의 계보에서 빼지 않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의 증조모 룻이 이방 여인이었다’, ‘모압 족속이었다는 사실은 숨기고 싶은 일이지 드러내어 밝히고 싶은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드러내어 밝히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이걸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숨겨도 될 텐데 드러내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누굽니까? 여기 밧세바라는 이름은 안 나오지만 여기에 나오는 우리야의 아내는 밧세바입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아니에요. 남의 아내였습니다. 다윗의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다윗이 강제로 취한 여인입니다. 다윗의 일생에 가장 부끄러운 역사, 숨기고 싶은 역사예요. 만일 오늘날의 역사가들이 그 역사를 기록한다면, 아마 다윗 왕을 치켜세우기 위하여 밧세바를 조금 나쁜 여자로 기록할 수도 있어요. 오늘날의 의도를 가진 역사가가 역사를 기록한다면, 밧세바는 원래 남자를 잘 유혹했던 여자다. 이렇게 기록할 수도 있어요. 오늘날의 역사라면 그렇겠죠. 그러나 마태는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기록하느냐 하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가 아니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이렇게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어요. 마치 다윗 왕에게 망신을 주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부끄러운 부분을 오히려 들추어내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도 별 수 없는 인간이었어요. 다윗이 밧세바를 취했는데 임신합니다. 자기 아이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려고 충성스러운 자기 신하 우리야를 불러 집으로 가서 쉬라고 말합니다. 아주 교묘하죠. 우리야는 충성스러운 군인이라 나의 동료들이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데 나만 어떻게 집에 가서 편히 쉴 수 있습니까?” 그러고 집으로 안 갑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우리야를 전쟁터 제일 앞으로 보내 적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하라.’ 실제로 우리야는 그렇게 죽습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의 인간성을 보세요. 누구라도 죄의 노예가 되면 이렇게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성이 드러나는 거예요. 다윗도 별 수 없는 인간이었어요. 다윗의 치부를 숨기려고 할 텐데 자세하게 드러냅니다. 다윗이 남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이것을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숨겨야 할 것들도 드러내어서 밝혀 기록하고 있을까요?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계보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며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영원한 메시야이심에 틀림이 없다. 이것은 진실이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고 진리이다. 거짓이 아니기에 진리다.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거짓이 없습니다. 성경은 믿을 수 있고, 믿어도 되고, 믿을 수밖에 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죗짐을 짊어지고 가신 우리의 유일하신 구주이시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 바로 그분이심에 틀림이 없다. 이게 진실이라는 거예요. 여기에 거짓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계보에서 가장 우선하는 가치는 진실입니다. 정직입니다. 진실하기에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보는 진실에 진실을 더한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는 방식이 진실과 정직입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 배가 열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지으신 원리이고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직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꽃은 시들지만 정직은 시들지 않아요. 정직함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정직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진실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여러분의 죄가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씻어 여러분을 하나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을 분명히 믿습니까? 어떻게 그 사실이 이루어졌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정직한 십자가입니다. 흉내 내신 게 아니에요. 채찍에 맞으시는 척하신 게 아니고 무서운 채찍에 다 맞으셨어요. 십자가 지는 척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정직한 십자가예요. 우리가 정말 그 복음을 믿는다면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늘 정직의 가치를 지켜야 합니다. 진실의 가치를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교회가 왜 욕을 먹어요? 왜 전도의 문이 막힙니까? 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져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보다 거짓말하기를 더 쉽게 합니다. 교회가 언제 부흥했습니까?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믿을 수 있다고 했을 그때 교회가 부흥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어요. 언제부터 교회가 내리막길이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도 믿을 수 없어라고 했을 그때부터 내리막이었어요. 예수님의 진실한 십자가가 나를 살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는다면 목숨 걸고 정직의 가치를 지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봅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결국은 이기고 승리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목숨 걸고 정직의 가치를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거짓도 용납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직의 가치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해요. 예수님의 계보를 보세요. 숨기고 싶고, 숨기고 싶은 일을 오히려 드러내요. 진실에 진실을 더하여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은 외투 한 벌, 200세겔에 금덩어리 하나를 감추었는데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식들을 포함해 가족 모두 다 불태워져 돌무더기가 되고 말았어요. 성경은 정직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진실한 사람은 삶도 진실해야 돼요.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말을 합니다. 얼마를 숨겨두고 감추어 두었으면서 전부 다 가져왔다고 거짓말했는데 그것 때문에 부부가 한날에 벌 받아 죽었어요.

구약성경도 신약성경도 정직의 가치는 목숨보다 귀하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거짓말하는 것 고쳐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사기 더 잘 치더라, 거짓말 더 잘하더라, 이제 이거 끊어버려야 합니다. 목숨보다도 귀한 것이 정직의 가치다. 진실의 가치다. 여러분은 이것을 기억하고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우리 더 하나님 앞에 더 정직한 믿음으로 살기를 축복합니다. 여기 예수님의 계보에 부끄러운 역사가 다 드러나잖아요. 우리 하나님 앞에 가면 우리 행한 대로 하나님 우릴 심판하실 때 다 드러나요. 하나님 앞에서 더 정직하게, 더 진실하게 믿음 지키고 살아가는 이 땅에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 살아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여행을 하다가 배가 고파 옵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돈도 다 떨어졌어요. 저기 부잣집이 보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죠. 아들아 지금 우리 앞에 사람이 없지, 뒤에도 사람이 없지, 우리 옆에도 사람이 없지?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 그러니까 내가 부잣집 담을 넘어가서 부잣집에서 귀한 보물을 훔쳐 가지고 와서 그걸로 우리 뭐라도 사 먹자. 그때 아들이 말해요. 아빠 앞에도 보는 사람 없고, 뒤에도 보는 사람 없고, 옆에도 보는 사람 없지만, 저기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셔요. 아버지가 정신을 차렸대요. 여러분, 우리는 부모로서, 앞선 자로서 정직의 가치를 내 목숨의 가치보다 더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온전한 믿음의 백성으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작은 거짓이라도 용납하지 않겠다. 여러분 이 결단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계보가 밝히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가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무한한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계보에는 두 가지 아주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첫째는 정직의 가치예요. 둘째는 사랑의 가치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계보에 다말, 라합, , 밧세바, 이런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이름도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 죄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오늘 내 모습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예수님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인류 구원의 역사 속에 포함시키셨어요. 그래서 나같이 못나고 더럽고 추한 인간도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계보는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한계가 없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줘요. 예수님의 계보는 하나님 사랑의 너비와 하나님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보여주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하나님 사랑은 넉넉히 품고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있어 내가 구원받은 거예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한 일서 48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로마서 58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하나님의 그 사랑이 나를 살리고 나를 구원했습니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의 사랑, 무한한 사랑, 영원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제법 오래전 일이긴 합니다만 무료 밥집을 운영하면서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해 주는 귀한 일 하는 스님이 계셨어요. 그분이 지하철 입구에 시주단지를 놓고 모금을 하고 있었어요. 목탁을 두드리면서. 그런데 교회 다니는 용감한 청년 하나가 한 손에 십자가를 들고 그리고 쫓아갑니다. 다가가서 스님의 머리에 오른손을 올리고 기도를 하는데 이렇게 기도했대요. “마귀야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오만한 기독교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가치를 지켜야 합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정직의 가치를 지키고 사랑의 가치를 지킬 줄 아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질적으로 손해 보더라도 사랑의 가치를 지키시길 바랍니다. 형제 사이에 부모님 유산 문제로 다투고 하나님 영광 가리고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가치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돈보다 사랑을 선택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이요 복음을 아는 성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할머니 집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아픈 분이었어요.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합니다.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무릎이야.” 그런 분이에요. 그런데 주일날 예배당에 일찍 왔어요. 예배당이 2층인데 올라갈 때 10분 이상 걸려서 예배당 2층으로 올라가서 예배드리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누가 쫓아와서 말하는 거예요. “지금 마당에 집사님 아들 내외가 손자를 데리고 왔어요.” 늘 보고 싶었던 손자가 왔다는 말에 할머니가 2층 예배당에서 1층 마당으로 내려가는데 날아서 갔대요. 어떻게 내려갔는지도 모르고 뛰어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이에요. 오늘 예수님의 계보에 나타난 두 가지 중요한 가치 정직의 가치와 사랑의 가치를 우리 주님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목숨 걸고 꼭 지켜가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21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인들의 구주가 되셨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정직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 이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에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계보가 품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 정직의 가치와 사랑의 가치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목숨과 바꾸어도 좋은 것입니다. 목숨보다 더 귀하게 정직의 가치를 지키고 사랑의 가치를 지켜가면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우리 언제라도 선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언제나 드러낼 수 있는 살아 있고 깨어 있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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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태복음 1:18~25)
  • 2024-05-20
  • 박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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