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만족하십니까?(민수기 11:4~9)_김준수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이 ‘삶에 만족하십니까’입니다. 여러분은 삶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불만족 하십니까? 지금 여러분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각자 한번 자기가 생각하는 삶의 만족도를 0에서 10 사이에서 측정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0은 최악의 불만족 상태, 지옥입니다. 거기에 비해 10은 최고의 만족 상태, 천국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가 0~10 사이 어느 정도 될 텐데 자신의 상태를 수치적으로 한번 스스로 생각하셔서 마음에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0쪽으로 가까운 분도 계실 거고, 어떤 분들은 또 10쪽으로 가까운 마음의 상태로 계신 분도 있을 줄로 생각됩니다.
직장인 10명 중 8명이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삶에 불만족한다고 합니다. 좀 더 월급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는데 너무 적다고 생각합니다. 또 뉴스를 보니까,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가 OECD 38개 회원국 중에서 37등이에요. 꼴찌에서 2등입니다. 38등이 어느 나라인 줄 아세요? 튀르키예, 예전 터키예요. 그 나라를 빼면 만족도가 OECD 회원국 중에서 꼴찌입니다. 우리 한국이 경제 규모로는 세계 10위권에 든다고 하고요, 또 개인 소득도 최근 일본을 추월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삶의 만족도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케이팝이나 케이푸드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잘 살았던 때가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매우 낮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광야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매우 흡사합니다. 광야는 기후가 매우 덥고 메마른 땅입니다. 저도 오래전에 성지 순례를 갔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었던 그 광야에 도착해서 버스에 내려서 그 광야 길을 좀 걸었던 적이 있어요. 한 30분 걸었던 것 같은데, 바람도 강하고 흙먼지도 많고 더워서 금방 지쳤습니다. 그래서 빨리 차에 다시 타고 싶더라고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환경도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경쟁도 심하고 또 여러 가지 먹고사는 것도 어려운 분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지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광야와 같은 세상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불만을 토해냅니다. 민수기 11장 1절 말씀을 보시면 힘들다고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또 4절 말씀에 보시면 고기를 달라고 불평합니다. 민수기 14장 1절에서 4절 말씀에 보시면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가난한 땅에 거인이 산다고 울면서 불평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 20장 2절과 3절 말씀에 보면 물이 없다고, 목마르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 말씀에서도 불평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이 민수기 11장 6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이 기력이 다하다는 말은 단지 육체적으로 쇠약해졌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이제는 광야 생활에 지쳤다는 말입니다. 삶의 피곤해진 상태입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피곤은 잠을 자고 휴가를 다녀오면 풀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잠을 자도, 휴가를 다녀와도 풀리지 않는 피곤이 있어요. 이건 삶에 지친 피곤, 마음의 피곤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적인 피곤으로 지친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기에 짜증이 나고 불평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도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신자는 이 불만족한 삶을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견디면서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오늘을 감사함으로 즐겁게 만족하면서, 누리면서 천국을 기다리는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외적인 상황을 뛰어넘는 내적인 만족을 주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온도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이 계시고 또 온도조절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이 계세요. 온도계의 특징은 주위의 온도가 올라가면 온도계 눈금도 올라가요. 주위의 온도가 낮아지면 온도계의 눈금도 낮아지는, 환경에 좌우되면서 환경에 따라서 살아가는 마음도 있어요. 조금 상황이 좋으면 내 마음도 괜찮아져요. 그러다 상황이 나빠지면 내 마음도 금방 낙심되는 그런 마음으로 사시는 분이 계세요. 그러나 어떤 분은 온도조절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분이 계십니다. 온도조절기는 온도를 올려놓으면 그 주위의 온도를 따라 높이는 거예요. 온도를 내리면 주위의 온도를 내리는,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을 다스리고 환경을 만들어 가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시는 분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광야와 같은 어려움과 힘든 삶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고 환경을 이기고 극복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자의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경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쁨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세요.
우리 시편 4편 7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환경이 주는 만족, 누구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 마음이 즐겁고 기쁘고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이 주는 기쁨도 있지만 주님이 그 환경을 뛰어넘는 내적인 만족과 기쁨을 주신다고 말씀하세요. 오늘 우리 예배에 참석하신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이 바로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이런 기쁨으로 풍성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주님이 주시는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는 비교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피곤하고 모든 일에 짜증과 불만을 토해내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왜 광야 생활을 하는지를 잊어버렸어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택받은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지금 약속받은 백성으로서 젖과 끌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광야를 지나는 여정에 있었어요. 광야 생활은 종착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인도하고 계세요.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체험합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을 목도했어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재앙을 통해서 애굽 백성들을 초토화하고 애굽왕을 납작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기적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이들은 홍해가 둘로 갈라져서 바다가 마른 땅이 되고 마른 땅 위로 홍해를 건넜던 이적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생활을 통해서 거룩하게 하시고 구분된 백성으로 훈련시킵니다.
그런데 이 본문 말씀을 보면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 그런 신앙의 체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 생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렸어요. 내가 왜 광야에 살고 있는지를 망각했습니다. 두 사람이 벽돌을 쌓는 일을 하고 있어요. 뜨거운 여름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면서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이분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불평을 쏟아내면서 이야기합니다. “당신 보면 몰라요? 이 뜨거운 뙤약볕에서 지겹게 내가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 아주 죽겠어요.” 똑같이 벽돌을 쌓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저는 지금 성전을 짓고 있어요. 내가 쌓는 벽돌 하나하나가 모아져서 아름다운 성전의 벽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내가 왜 그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지겨운 겁니다.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내 삶의 목적을 아는 사람은 그 일을 통해서 삶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마음속에는 불평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애굽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오늘 5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 노예생활을 했어요. 이들은 채찍 맞으면서 죽도록 노동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노예생활 중에 애굽 사람들이 던져주는 생선, 수박, 부추를 겨우 얻어먹으면서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요. 그런데 지금 광야 생활이 어렵고 힘드니까, 오히려 과거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예요.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 차라리 그때 여러 가지 이것저것 맛있는 것 먹었던 것이 나에게는 더 행복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현재에 불만족할수록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어요. 과거를 자꾸 비교하고 오히려 옛날이 좋았다고 그리워합니다. 결혼하기 전이 좋았지, 은퇴하기 전이 좋았지, 아이들이 어렸을 때가 좋았지, 예전 기회가 좋았지, 그렇게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미화하면서 오늘을 더 지겨워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은 과거와 비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자꾸 비교해요. 다른 사람은 다 문제없이 사는 것 같습니다. 나보다 다 행복한 것 같아요. 자녀 문제도 없는 것 같고, 돈 문제도 없는 것 같고, 나만 이렇게 불행하게 사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비교하는 마음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에요. 비교할수록 나는 더 불만족스럽고 내 삶은 더 불행해집니다. 그걸 알면서도 불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아이러니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하향 비교보다 상향 비교에 익숙한 거예요.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항상 나보다 잘나가는 사람과 비교해요. 내가 연봉이 한 5,000~6,000민 원 되면 그 정도로 살만하다고 생각하다가도 내 친구가 1억 원 번다는 소리를 들으면 금방 불만족합니다. 내 연봉이 전혀 마음에 만족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비교하지 않고 살기가 어려운 것도 현실이에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비교 당하면서 살았어요. 학교 다닐 때는 등수로 내 가치가 비교됐습니다. 사회에 나오면 연봉으로 내 가치가 판단됩니다. 심지어는 교회도 교인 수로 비교되고 판단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규태 씨라는 분, 예전에 한국일보 칼럼을 썼던 분이신데, 그분이 쓴 책에 한국 사람을 가르쳐서 끝없는 사다리를 올라가는 사람들이라고 비교해요. 사다리가 있는데, 끊임없이 끝이 없는 사다리를 올라가요. 그런데 내 사다리로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옆 사다리로 올라가는 사람이 나보다 더 높이 올라간 게 문제예요. 내가 암만 올라가도 또 내 옆에는 더 높이 올라간 사람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보면서 주눅 들고, 그 사람을 보면서 비교되어 끊임없이 그 사람 쫓아 올라가다가 인생을 마치는 한국인이다. 이런 표현을 쓰고 있어요.
비교를 통해서는 진정한 삶의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옆을 보면서 비교하면 끝이 없어요. 비교하는 판단을 내려놓아야 내 삶에 만족이 찾아옵니다. 물건은 살 때 비교해야 돼요. 흠집이 있는지, 제대로 만들었는지 잘 비교해서 제대로 된 상품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상품 구입법입니다. 특별히 남자보다도 여자들은 더 꼼꼼하게 비교해서 물건을 사요. 그러나 사람은 비교할 수 없어요. 인간의 삶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각기 자기의 독특한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절대로 남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오렌지와 수박을 비교할 수 있을까요? 오렌지는 오렌지 나름대로의 맛과 크기 향이 있어요. 수박은 수박대로 나름대로의 크기와 맛이 있습니다. 오렌지를 보면서 너는 왜 수박 맛이 안 나니? 너는 왜 수박처럼 그렇게 사이즈가 크지 못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옆을 바라보지 말고 위를 바라봐야 돼요. 나를 불러주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만족감을 누려야 돼요. 사도바울은 주안에서 절대적 만족감으로 사는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과 12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러분도 이 사도바울의 비결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있어요. 1달란트, 2달란트, 5달란트 받은 종이 나와요. 그중 1달란트 받은 종은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둡니다. 그러나 2달란트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해서 또 2달란트를 남겼습니다. 5달란트 받은 종은 더 열심히 일해서 또 5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시작할 때는 2달란트와 5달란트로 3달란트 차이였는데 나중에 결과를 보니까 4달란트와 10달란트로 6달란트 차이가 난 거예요. 두 사람의 가진 것이 더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2달란트 받은 종과 5달란트 받은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똑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항상 최선의 것을 주셨어요. 2달란트 받은 종은 그 2달란트가 최선의 것이에요. 5달란트 받은 종은 그 5달란트가 최선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 5달란트를 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서 있게 하신 이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불러주신 이 자리를 감사하시고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의 텍사스에 좀 살았는데 텍사스는 굉장히 더워요. 그래서 여름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날씨입니다. 휴스턴이라는 그 도시에서 뉴욕으로 제가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됐는데 비행기를 타고 나서 그 주위를 보니까 그 집들이 보여요. 텍사스는 굉장히 덥기 때문에 집마다 수영장을 다 만들어서 더위를 식혀요. 큰 수영장, 조그만 수영장 또 어떤 집은 고무 튜브에다 물을 받아서 더위를 식히기도 합니다. 비행기가 조금씩 이륙하니까 내 주위에는 큰 집, 작은 집, 큰 수영장, 조그만 수영장, 고무 튜브의 물 받은 그 집도 보여요. 다 차이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비행기가 하늘을 향해서 점차 높이 이륙해서 올라갈수록 내 눈에 어떤 모습이 보였을까요? 집들이 다 고만고만해 보여요. 성냥갑처럼 다 작아 보입니다. 더 올라가면 그것도 보이지 않으면 점으로 보이는 거예요.
제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이렇게 물어봤어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영적인 의미가 뭡니까?’ 우리가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면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잘나고 못나고, 크고 작고,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 이런 것들이 다 눈에 들어오고, 이런 것들이 우리를 시험하게 하고, 시험 들게 하고, 주눅 들게 하고, 교만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높이 올라갈수록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고만고만해 보입니다. 큰 차이가 아닙니다. 다 도토리 키 재기예요.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고, 못 났으면 얼마나 못났습니까? 그저 조금 가진 거, 조금 못 가진 것을 죽고 사는 문제처럼 거기에 붙들려서 불평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에는 많은 다른 비둘기가 주로 부두에서 맴돕니다. 왜 부두에서 맴돌까요? 고기잡이배에서 던져주는 찢어진 고기, 썩은 고기, 그거 얻어먹기 위해서 부두에서 주로 맴도는 거예요. 조나단이라는 이 갈매기는 높이 난다고 했어요. 높이 날아야 멀리 볼 수 있기 때문에 높이 날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도 이와 같아요.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멀리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당장 주변에 있는 적고 많고, 작고 크고, 이런 것들에 큰 차이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삶을 좀 더 초월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우리 시선을 위로 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최선의 것을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비교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좀 더 마음에 만족을 얻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오늘 말씀해 주는 지혜는 오늘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지치고 짜증과 불만을 쏟아내는 이유는 이들이 오늘의 감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순간을 감사하십니까? 여러분, 만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매일 공급해 주시는 은혜의 양식이었습니다.
민수기 11장 7절에서 9절까지 만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처음 이들이 만나를 받았을 때는 광야에서 식량이 떨어지고 배가 고플 때였어요. 그러니 이 만나가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얼마나 맛있겠어요? 신기하고 꿀 섞은 과자 맛 같다고도 하면서 기쁘게 받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지겨워지는 거예요. 6절의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라는 말은 매일 만나만 먹으니까 지겹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좀 메뉴를 다양하게 구성하셔서 삼겹살도 주시고, 채소도 주시고, 생선도 주시면 좋겠는데, 매일 만나만 주니까 이제는 지겨워진 거예요. 불만족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인간의 제약된 마음의 특징은 항상 새것을 원합니다. 있는 것의 감사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자꾸 뭔가 새로운 것을 찾는 거예요. 지금 있는 것에 싫증을 잘 냅니다. 현대사회는 인간의 불만족이 가장 중요한 마케팅의 대상이에요. 핸드폰도 자꾸 업그레이드 시켜요. 새로운 기능을 만듭니다. 그러면 내가 갖고 있는 옛날 핸드폰은 구식인 거예요. 그래서 불만족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자꾸 새것을 사게 만드는 겁니다. 인간의 불만족을 자극해서 새로운 물건을 사게 하는 것이 현대 마케팅의 핵심이에요.
남녀가 처음 만나서 연애할 때는 새롭고 두근거리고 만나면 짜릿합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연수가 지날수록 매일 보는 얼굴이 무감각해지는 거예요. 그 얼굴이 날마다 좀 바뀌면 좋은데 맨날 똑같은 얼굴이라서 지겨워지는 거죠. 같이 살수록 자꾸 나쁜 점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불만이 생기고 잔소리가 많아지는 거에요. 왜 내 아내는 다른 여자들처럼 좀 잘 꾸미지 못할까? 왜 남편은 다른 남편들처럼 좀 자상하지 못할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서 가지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불평불만이 많아지는 거예요. 부부 세미나를 하면 부부들에게 서로 장점을 쓰라고 해요. 그러면 굉장히 힘들어해요. 장점 찾기를 굉장히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단점을 쓰라고 하면 신나서 써요. 막 종이가 모자라서 더 달랄 정도로 얼마나 잘 쓰는지 알 수가 없어요.
어느 목사님이 이혼 직전의 부부를 상담하면서 흰 도화지를 주고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각나면 점을 찍으라고 했어요. 두 사람이 백지를 받고 처음에는 점을 생각나는 대로 찍기 시작하다가 상대방이 막 빨리 찍으니까 자기도 막 점을 찍기 시작해서 많은 점을 찍었어요. 그래서 그 점을 찍은 종이를 목사님께 갖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많은 점이 찍힌 종이를 보면서 “점을 많이 찍으셨네요. 그래도 검은 점보다는 흰 부분이 많습니다. 점들을 보지 마시고 바탕에 있는 흰 색깔을 보면서 살려고 애쓰세요” 하면서 조언했다고 합니다.
부부 생활만 그러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오래갈수록 자꾸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처음 예수님 믿을 때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뜨겁고 감사한 마음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자꾸 무뎌지는 거예요. 감사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신앙이 형식화되고 습관화되는 거예요. 예배에 감격이 없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마음에 울리는 게 없어요. 여러분,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움은 새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무언가를 대하는 새로운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는 거예요.
시편 98편 1절 말씀을 보시면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구절이 있어요. 꼭 새로 노래를 지어서 찬송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 마음이 새로워지면 익숙한 찬송이 마치 내 삶에 처음 부르는 찬송처럼 감격이 오는 거예요. 이 예배 참석하는 연수가 오래되다 보면 예배 때 가사를 마음속에 기억하면서 찬송하는 분은 많지 않아요. 그냥 습관처럼 찬송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새로워지면 수없이 불렀던 찬송인데 그 찬송 가사가 내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내 마음에 감동을 주고 눈에 눈물이 맺힐 때가 있어요. 저도 얼마 전에 예배드릴 때 그 어떤 찬송의 가사가 마음에 탁 부딪히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치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부르는 찬송처럼, 내가 마지막으로 드리는 예배처럼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면 우리의 찬송과 예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진리는 평범한 곳에 있습니다. 행복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어요.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내 삶의 자리에서 만족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어릴 때 소경이 되었던 헬런 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나에게 3일 동안 볼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진다면 나는 이런 것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첫째 날에 나에게 친구가 되어 주었던, 그리고 나를 친절히 대해 주었던, 그래서 나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또한 갓난아이의 얼굴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읽어 줬던 많은 책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둘째 날에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책을 통해서 쓰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도 내일이면 내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소경이 된다면 여러분 지금 보는 것이 새로워질 수가 있어요. 내가 오늘 예배가 마지막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하면 이 예배가 우리 마음 가운데 새롭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오늘 집에 가셔서 가족의 얼굴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내가 마지막 보는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마음으로 가족을 보시면서 가족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예배가 내가 이 세상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하시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나에게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영어로 현재를 프레젠트라고 하죠. 선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순간, 바로 오늘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나에게 주신 이 선물에 감사하고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제가 뉴욕에서 목회할 때 교회 청장년부 소속의 유학생 부부가 있었어요.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한국에서 이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서 귀국하게 됐는데, 이분들이 귀국하기 전에 뉴욕에서 LA까지 자동차로 횡단하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렌터카로 뉴욕에서 LA까지 먼 여정을 떠났어요. 안타깝게도 이들이 중간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어요. 아내는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 남편이 척추를 다쳐서 온몸이 마비됐어요. 그래서 굉장히 힘들게 지내신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한국에서 요양원에도 계시고 병원에도 계시며 힘든 나날을 지내시다가 뉴욕에서 신앙생활 하던 뉴욕에서 자기를 도와줬던 교우들이 생각나서 교회에 편지를 보냈어요. 그 편지 내용에는 그 뉴욕에서 유학하는 동안 교회에서 생활했던 기억이 너무나 그립다는 내용을 편지에 담았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이분이 쓴 글을 잠깐 읽어드리면, ‘주일날 아침 아내와 손을 잡고 걸어서 교회에 가던 것이 내게는 너무나 큰 행복이었습니다. 주일날 성도들을 만나서 인사하고 예배 때 듣던 설교가 나에게는 너무나 큰 기쁨이었습니다. 예배 후에 친교실에서 성도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하던 시간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얼마나 행복했던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일상의 행복을 깨닫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후회하는 우리들이 됩니다. 행복을 멀리서 찾으려 하지 마시고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행복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찾으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이미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단지 그것을 모르고 지낼 뿐입니다. 저도 자녀들이 다 커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가끔 어릴 때 사진을 보면서 ‘내가 그때 왜 좀 즐기지 못했을까, 그때 좀 감사하며 살지 못했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만나가 주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시작할 때 내가 마음에 생각했던 삶의 만족도보다 조금 더 올라간 삶의 만족을 가지시고 오는 한 주간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김준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