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울었더라(마가복음 14:66~7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위에 패를 써서 붙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귀였습니다. 그 패는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0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읍시다.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히브리어는 무엇이고 로마어는 무엇이며 헬라어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성경공부를 조금 하시는 분들은 아람어라는 게 나오는데 이 아람어는 또 무엇인가? 그런 생각하신 분들 계실 것입니다. 오늘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어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사용했던 언어입니다. 창세기 14장 13절에 히브리 사람 아브람이라는 말씀이 나와요. 히브리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가리키는데, 대체로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구약성경의 언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사용했던 히브리어입니다. 현재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히브리어를 쓰는데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는 현대 히브리어라 해서 고대 히브리어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한 언어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헬라 철학자들의 언어가 헬라어입니다. BC 323년에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헬레니즘 문명은 아주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코이네 헬라어가 공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시대니까 공식적인 문서에는 로마제국의 언어인 라틴어가 사용되었지만 헬라어가 오히려 더 광범위하게 공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고대 그리스(헬라) 철학자들의 언어인데 신약성경의 언어입니다.
구약성경에도 가끔 나오고 신약성경에도 가끔 나오는 언어가 하나 더 있어요. 아람어라는 것인데 이게 좀 어렵습니다. 아람어는 또 무슨 언어일까요? 아람어는 고대 근동지방, 그러니까 중동에서 아시아 지역의 아랍 민족이 사용하던 언어입니다. 아람어는 중동 전역에서 무역과 외교 언어로 널리 사용되었던 고대 제국의 공용어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고대 제국의 공용어인데 지금 우리로 치면 거의 영어에 해당하는 수준입니다. 정확하지는 않고 꼭 일치하지는 않지만 여러분이 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해 보면 아람어는 지금의 시리아, 즉 앗수르제국의 언어라고 설명하면 여러분이 좀 쉽게 이해하리라 생각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제국에 망하고 앗수르 땅으로 포로로 끌려갔죠. 그러고는 앗수르 사람들이 강제로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강제로 이주당해 살게 됐습니다. 그리고 남 유다는 바벨론제국에 망하고 바벨론 땅으로 포로로 끌려갔죠. 그 당시 국제적인 고대 제국의 공용어가 아람어였어요. 그러니까 이 아람어의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이 아람어는 예수님 당시에도 통용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대 제국의 공용어 아람어가 널리 사용되었는데, 성경에 여러분이 아는 단어 중 ‘달리다굼’, ‘에바다’, ‘마라나타(주예수에 어서 오시옵소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런 말씀이 대표적인 아람어에 해당합니다.
구약성경의 언어는 히브리어입니다. 신약성경의 언어는 헬라어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조금씩 기록되어 있는 언어는 아람어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가 통용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학자들은 예수님 당시에 아람어가 제일 많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같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성경 배경 지식 하나를 더 추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운 이 성경 배경 지식 하나로 이제 성경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볼 수 있겠는데, 오늘은 특별히 베드로의 일생을 한번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사도 바울에 관해서는 설교도 많이 하고, 그래서 많이들 알지만 베드로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죠? 오늘은 베드로의 일생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시몬 베드로로 불렸습니다. 베드로의 이름 중에 게바라는 이름이 또 있습니다. 오늘 한번 같이 공부하고 지금부터 배우기로 합니다.
마가복음 3장 16절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베드로의 본명이 시몬이고 시몬에 더해진 이름이 베드로예요. 베드로는 더해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로 불렸습니다. 시몬은 ‘들으신다, 응답하신다’는 뜻인데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이 시몬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시몬 베드로라 하는데 베드로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은 반석입니다.
요한복음 1장 42절 같이 읽겠습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께서 미래에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시며 베드로에게 이름을 붙여주셨는데 게바라는 이름을 주셨어요. 이 게바는 아람어 이름입니다. 이 게바도 베드로와 뜻은 같아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부터 18절까지 같이 읽읍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누구라고 하느냐?” 그다음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질문하세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나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고백은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드로에게 하게 하신 고백이에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베드로가 고백한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어요.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베드로가 고백했던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어요. 그 신앙고백이 교회의 반석입니다. 베드로에게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의 기초가 되는 신앙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 게바라는 이름을 가졌지 않느냐? 그 이름의 뜻도 반석, 기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다’라고 주장하죠. 그리고 로마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이후의 교황들은 다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하죠.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베드로가 했던 그 신앙고백이 교회의 반석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머리가 아니에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은 예수님이셔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보이는 사람이고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르고 정확한 신앙고백을 했다는 점에서 베드로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베드로가 교회 반석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고백했던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요 교회의 반석입니다.
마가복음 14장 29절부터 31절까지 함께 읽읍시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는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이었어요.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 베드로에게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말이 너무 앞서는 사람이었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깊이 안 들어요. 자기주장, 자기 말이 너무 앞서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 흩어질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왜 저런 말씀을 하실까, 깊이 좀 들어야 하는데 말을 안 들어요. 자기 말만 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있는데, 내가 여기 있는데, 뭔 걱정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혹시 다른 제자들을 버릴지 몰라도 저는 주님을 안 버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생각을 좀 하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너무 앞서는 거예요. 이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다시 말씀하세요.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세요. “베드로야, 내 말 잘 들어라.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는 분 잘 없잖아요. 예수님은 베드로가 워낙 말을 깊이 안 들으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요. “닭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말씀하시면 베드로가 이제는 주님 말씀 좀 들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더 큰소리칩니다. 역시 말이 너무 앞섭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제자 베드로가 그렇게 나서니까, 주님 말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만 앞세우니까, 베드로가 그렇게 나서니까 다른 제자들도 따라가요. 우리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우리도 나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결국은 다 예수님 부인하고 도망치고 말았잖아요. 다 실패하고 말았어요. 주님 말씀 깊이 새겨듣지 않던 베드로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자기만 실패한 게 아니에요. 자기 동료들도 다 망하게 만들었어요. 다 실패자로 만들고 말았어요. 어느 공동체든지 그 공동체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수제자로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말씀을 깊이 듣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말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똑같이 그렇게 행동하는 거예요.
구역 식구 중에, 전도회 회원 중에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우스운 소리, 농담이나 해요. 농담으로 분위기를 이끌어 가요. 그리고 매일 놀러 다니고, 그러면 구역도 전도회도 그런 방향으로 가기가 쉬워요. 그러면 그 공동체의 영적 손실은 엄청난 거예요.
그런데 구역 식구 중에, 전도회 회원 중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면 달라져요. 늘 성경 읽고 큐티하고, 지난주일 목사님 말씀에 ‘섬기는 자 되라’ 그 말씀 들었는데 나 참 마음이 많이 찔렸다. 그렇게 말씀 나누고, 어젯밤에 내가 집사님 생각이 나서 집사님 위해 기도하고 잤거든,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내가 더 기도 해 줄게. 구역이나 전도회에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면 완전히 달라져요. 그 공동체가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성령 충만해지고, 주일이 기다려지고요, 서로서로 만나고 싶고요. 만나기만 하면 기쁘고 반갑고 감사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누가 이끌어 가느냐, 누가 리더가 되느냐가 중요하고 리더가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느냐가 매우 중요해요. 우리 정치 현실을 봐도 그렇잖아요. 누가 리더가 되느냐, 그 리더가 어떤 사람이냐,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느냐, 이건 너무나 중요하단 말이에요. 주일 학교도 마찬가지고 중고등부, 청년부도 그렇습니다. 찬양을 왜 해? 그만큼 했으면 됐지. 좀 놀자고. 중고등부 아이 중에 그런 애들 한두 명만 있어도 그 중고등부는 찬양이 안 돼요. 청년 중에 한두 사람만 ‘성경 공부 왜 해? 머리 아프게. 놀러나 가자고.’ 그러면 그 청년부는 그런 방향으로 가버려요. 누가 리드하느냐, 리더가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느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분위기 메이커입니까? 여러분을 공동체를 흥하게 하는 사람인가요, 공동체를 망하게 하는 사람인가요? 좀 좁혀서 여러분의 역할이 여러분 가정에서 어떤 역할인가요? 가정을 영적으로 막 일으키고 살리나요? 가정을 영적으로 타락하게 하고 윤리 도덕적으로도 무너지게 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공동체를 흥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망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마가복음 14장 5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주님 말씀 깊이 안 듣고 자기주장만 하고 그랬더니, 결국 제자들이 다 도망갔어요.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4절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베드로는 그래도 자기가 내뱉은 말이 있으니까 주님을 따라가긴 했는데 멀찍이서 따라가요, 조심조심. 말이 앞섰던 베드로와 지금 주님 잡혀갔는데 자기는 안 잡혀가려고 몰래 숨어서 따라가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한번 비교하며 상상해 보셔요. 얼마나 차이가 나요? 베드로는 멀찍이서 주님을 따라갔어요. 결국 주님을 부인합니다. 완전히 실패자가 됩니다.
마가복음 14장 71절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베드로는 멀리서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아, 이 사람 갈릴리 사람, 내가 본 적이 있는데, 이 사람도 나사렛 예수, 그 사람의 제자라.’ 대제사장의 여종이 그렇게 말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어요? ‘예수, 나 그 사람 몰라. 난 그런 사람 몰라.’ 그렇게 잡아떼는 거예요. 다시 대제사장의 여종이 말해요. ‘아니라, 이 사람은 진실로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 이 사람이 그 도당이라.’ 베드로가 더 크게 부인합니다. ‘아니라니까. 나 나사렛 예수 그런 사람 몰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보고 ‘아, 이 사람 맞는데, 이 사람 갈릴리 사람, 이 사람도 예수의 제자임이 틀림이 없다.’ 그때 베드로의 반응이 놀라워요. 맹세합니다. 자기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며 저주를 퍼붓습니다. ‘왜 나를 나사렛 예수, 그 사람의 제자로 몰아붙이느냐?’ 맹세하고 저주를 퍼부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 버리지 않습니다. 큰소리치던 베드로, 저 나머지 제자들은 믿을 수 없어도 나는 믿어도 됩니다. 나는 주님 버리지 않습니다.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했던 그 큰소리치는 베드로와 자기는 안 죽고 살겠다고 ‘나 나사렛 예수, 그런 사람 몰라.’ 맹세하고 저주하는 베드로를 한번 비교하며 상상해 보셔요. 그 두 모습이 어떻게 비교가 되나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여러분, 솔직히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어요? ‘베드로 못난 사람, 배신자!’ 그런 생각이 드나요? 아니면 솔직히 ‘아 베드로 그 사람 딱 내 모습이네. 사실 내가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드나요? 아니면 이런 사람 있을 수도 있어요. ‘아니, 뭐 사람이 다 그렇지. 죽음 앞에서는 사람이 다 약해지잖아. 별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마가복음 14장 72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베드로가 세 번째로 잡아떼고, 예수 모른다고, 나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할 때 닭이 2번째 ‘꼬끼오’ 하고 울었어요. 그때 생각이 난 거예요. ‘아, 예수님 말씀이 정확하구나.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셨는데, 그 말씀 그대로 됐구나.’ 그래도 그때 베드로는 울었어요. 그래도 그때 베드로는 울었다고요. 오늘 우리 시대엔 어떻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예수님 부인하고도 믿음 다 팔아먹고도 울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직장생활 좀 편하게 해보겠다고 회식 자리에서 직장 상사가 술잔을 돌리는데 홀짝홀짝 다 받아 마셔요. 그래도 안 울잖아요. 오늘 우리 시대의 믿음이라는 게 이렇게 무너졌다고요. 제사상 앞에 절하면 편하니까, 우상숭배인 줄 알고도 제사상 앞에서 넙죽넙죽 절하잖아요. 믿음 다 팔아먹잖아요. 그러니까 20년, 30년 지나도 믿지 않는 집안 친척들 앞에 복음 한번 못 전하잖아요. 그래도 울지 않잖아요.
오늘 우리 믿음의 현주소가 어떻습니까? 숨어서 온갖 나쁜 짓, 죄를 다 짓고도, 그래도 울지 않잖아요. 회개하지 않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베드로는 울었다고요. 깊은 슬픔으로 울었다니까요?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베드로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참 슬플 것입니다. 안타깝죠.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성경에 베드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계속 이어집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
요한복음 21장 9절과 10절 같이 읽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예수님은 어때요? 그렇게 모른다 모른다, 나 예수 그런 사람 몰라. 맹세하고 저주하던 그 베드로인데, 그 배신자 베드로를 예수님이 찾아가셔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를 찾아갔어요. 그리고 베드로를 위해서 아침 밥상을 차려주셔요, 숯불을 피우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갈릴리 호숫가에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으로 숯불을 피우세요. 그 숯불 위에 떡도 구워놓고, 생선도 올려서 굽고 계세요. 그리고 베드로가 최대한 덜 부끄럽도록, 베드로가 덜 무안하도록 “베드로야, 네가 잡은 생선도 좀 가져오너라.” 베드로의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세요.
우리는 그 예수님의 방식을 좀 배워야 돼요. 우리나라에 정치하는 분들이 그 예수님의 방식을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배신자 베드로를 위해 아침밥상을 차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고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세요.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을 예수님께서 세 번 하세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는 평소에 깊이 새겨듣지 않았는데 주님이 같은 말씀을 세 번 하시니까 이제는 깊이 듣게 되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들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근심이 생겼어요. 원문으로 보면 뤼페오라는 동사인데, 깊은 슬픔으로 매우 고통스러워했다는 거예요. 심히 참회하고 회개했다는 거죠.
아마 예수님께서 세 번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을 때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 3번 부인한 게 생각났을 거예요. 그래서 마음에 큰 근심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베드로야, 너 나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것은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완전히 용서해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변화됐어요. 거기서 베드로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베드로의 변화를 좀 주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 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제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가 보는 거예요. 제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을 선포하거든요. 일어나 걸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베드로를 칭찬하고 칭송하고 베드로에게 박수를 보내고,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스타가 됐어요. 높은 자리에 올라간 거죠. 평소에 베드로가 그렇게 꿈꾸던 상황이 된 거예요. 많은 사람을 위해 높임을 받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자기 이름이 높이 드러나고, 자기가 칭찬받고, 평소에 베드로가 꿈꾸는 상황이 만들어졌잖아요.
그런데 그때 변화된 베드로는 오히려 고개를 숙여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사람을 이렇게 세운 것은 나의 권능과 나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나사렛 예수 그분의 권세로 일어난 것이다. 우리 다 예수님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고개를 숙여요. 베드로가 완전히 변화됐어요. 베드로가 변화되었을 때 그는 하루에 3,000명씩 전도하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됐어요.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일생을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의 일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돼요. 변화되기 이전의 베드로와 변화된 이후의 베드로로 구분되는데, 변화되기 이전의 베드로를 한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교만한 베드로’요, 변화된 이후의 베드로를 한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겸손한 베드로’예요. 베드로의 변화는 엄청난 교만에서 겸손으로 변화됐어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지 않았어요. 주님 말씀하시는데도 ‘주님, 걱정 마세요. 내가 있는데, 뭔 걱정입니까? 나는 주님 버리지 않습니다.’ 그랬던 베드로, 교만한 베드로죠. 그 자기주장이 살아있었던 베드로는 실패자였어요. 자기만 실패한 게 아니에요. 자기 동료 제자들도 다 실패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변화된 이후의 베드로는 겸손한 베드로예요. 이제 주님 말씀하실 때 대답도 잘 못 해요.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 말 한마디 대답하는 것도 너무 힘든 베드로가 됐어요. ‘주님,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것도 나보다 주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이제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베드로가 됐어요. 변화된 베드로, 겸손한 베드로, 그는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인생은 둘로 구분됩니다. 교만했던 베드로와 겸손을 배운 베드로, 이렇게 구분돼요.
베드로전서 5장 5절 같이 읽읍시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여기 베드로가 당시 압박받고 고통 중에 있던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무슨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는지 보세요. 무엇으로 허리를 동이라?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환란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시게 하면 이 환란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고백을 하는 거예요. 자기 일생 경험한, 자기 일생을 통해서 배우고 깨닫고 체험한 진리를 지금 전하는 거예요. ‘겸손으로 허리를 동입시다. 나는 죽고,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살아계시게 합시다. 그러면 이 환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대적하십니다. 겸손한 믿음으로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있게 합시다.’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고 기억합시다. 신앙생활이란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주인 되시게 하는 거예요.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주인 되면 처음 나타나는 현상이 겸손입니다. 사람이 겸손해져요. 신앙생활의 올바른 열매는 언제나 겸손입니다. 교만은 올바른 믿음의 열매가 아닙니다. 교만은 바리새인의 열매입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건 망하는 길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어제보다 오늘 더 겸손해지기를 바랍니다. 더 겸손한 성도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만은 올바른 신앙의 열매가 아닙니다. 교만은 바리새인의 열매예요.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 무엇이 교만입니까? 주님 말씀 깊이 안 듣는 게 교만이에요. 무엇이 겸손입니까? 주님 말씀 깊이 듣고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더 겸손한 믿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패망은 언제나 교만을 앞세우고 옵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해요. 패망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그 사람에게 교만한 증세가 나타난다. 패망의 얼굴이 뭐냐? 교만이에요. 교만한 얼굴은 곧 패망으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개인이나 공동체나 기업이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패망은 언제나 교만을 앞세우고 와요. 정권도 그래요. 교만한 정권은 금방 망해요. 우리는 언제나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가장 큰 것을 잃게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돼요.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 없어요. 교만한 사람은 받은 은혜도 쏟아버립니다.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비하라고 그래요. 예수님의 낮추심, 낮아지심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왔어요.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로 흐릅니까? 하나님 은혜는 낮은 곳으로 임해요.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도 없고, 교만한 사람은 받은 은혜도 쏟아버리는 거예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담을 수 있는 겸손한 성품을 지닌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받은 은혜 교만해서 쏟아버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간에 추석 명절이 있습니다. 집안 친척 식구들 만날 때 우리 더 겸손하기를 바랍니다. 숙제를 드리겠습니다. 우리 적어도 이런 말은 듣지 맙시다. ‘저 사람이 교만해졌네. 요즘 저 사람 좀 먹고살 만한가 봐. 어깨 힘이 들어갔어. 저 사람 교만해졌네.’ 여러분 이번 주간에 어느 누구도 우리 그런 말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랑, 자기 자식들 자랑, 나중에 자기 손주들 자랑까지 실컷 하고 자기만 엄청 잘난 척해 놓고, 내가 자랑하니까 다른 사람도 자기 자랑 좀 하고 싶잖아요. 그러면 말을 금방 끊어버려 말도 못 하게 하고 자기 자랑만 실컷 끝까지 자기 할 말만 엄청 하고, 자기 잘난 척만 엄청 해 놓고서 나중에 한마디 해요. 너도 이제 나처럼 예수 믿고 복 받아야지. 그러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할까요? 어떤 생각할 것 같아요. 아이고 재수 없어 그 속으로 그런 생각하지 않겠어요?
이번 주간에 여러분, 우리 그런 모습으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를 자랑하기, 나의 자존심 세우기, 나의 공로 주장하기, 나를 높이기, 이런 것은 좀 내려놓기 바랍니다. 나의 주장만 늘어놓고, 내 말만 하고, 누구를 만나든지 자기 말만 하고,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좀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공감해 주고, 격려해 주고, 우리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 저도 여러분도 최소한 ‘저 사람이 교만해졌네. 요즘 좀 형편이 좋아졌나 봐. 요즘 좀 먹고살 만한가 봐. 사람이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네. 교만해졌네.’ 우리 그런 말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말을 들어야 할까요?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다. 그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른 것 같아. 저기 봐. 우리 삼촌이 교회 장로님인데 뭔가 다르잖아. 저기 봐. 우리 고모가 교회 권사님인데 뭔가 다르잖아. 그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달라요. 교회 다니는 사람은 그래도 착하고 선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뭔가 우리와는 달라요. 바탕이 선해요. 여러분, 이번 주간에 우리 그런 말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렇게 살아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그렇게 살아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많이 배웠어도 겸손해야 그 배운게 참지식이 됩니다. 많이 가졌어도 겸손해야 많이 가진 것이 진짜 복이 됩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더 겸손해야 그 자리가 자기에게 합당한 자리가 되는 거예요. 우리 더 겸손히 예수님만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는 이 땅에 믿음의 향기 가득한 하나님의 사람들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