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요한복음 1:29~42)
세례 요한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도 세례 요한을 예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 중 엘리야 선지자처럼 귀하게 쓰임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설명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제일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세례 요한은 특별한 사람이고 아주 귀하게 쓰임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세례 요한은 분명한 자기 인식을 갖고 있었어요. 자기가 누군지를 알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주님만 높여드렸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진정 빛나는 일생을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자기 인식 세 가지를 지난주일 우리가 배웠습니다. 첫 번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세례 요한의 자기 인식 두 번째는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소리는 자기 역할을 하고 나면 사라져야 합니다. 그와 같이 나도 내 일을 다 한 이후에는 사라져야 할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의 자기 인식 세 번째는 “나는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님 그분의 종노릇하기에도 부족합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자기 인식이었어요. 세례 요한은 그렇게 분명한 자기 인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분명하게 증언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것도 세 가지입니다. 오늘 배우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첫 번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다는 말씀은 세상 죄를 깨끗이 지워버리신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 같이 읽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두 번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상징이다. 성령세례는 실체이다. 물세례는 죄 용서를 가져오는 성령세례의 외적인 표징이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주는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상징일 뿐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예수님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없애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증언했어요.
요한복음 1장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세 번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고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세 가지는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라고 증언했어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것은 모두 사실이고 진실이며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어요. 그것이 성탄의 은혜입니다. 성탄의 은총은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나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 서야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 설 때 유죄 판결을 받지 않도록 결코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려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어요.
이 은혜를 은혜 위에 은혜, 충만한 은혜, 끝없이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 다함이 없는 은혜라고 표현해요. 예수님은 이 땅에 은혜 위에 은혜로 오신 분이십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참 신기하고 놀랍고, 참 이상하기도 해요.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은 예수님이 받았어요. 그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세상에 지식이라는 것은 내가 죄를 지어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고 내가 죄를 지었지만 벌은 네가 받아라 이게 세상의 법도잖아요.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벌은 예수님이 받으셨어요. 십자가의 도는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것’이예요.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라는 것은 ‘너를 죽여 내가 살겠다’는 건데 십자가의 돈은 전혀 달라요. ‘내가 죽어 너를 살릴게. 벌은 내가 받을 테니까. 너는 다시 새롭게 살아라.’ 이게 십자가의 도이고, 예수님의 정신이며, 신앙생활이란 그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그 십자가의 도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거 아니에요. ‘십자가의 도를 알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나도 걸어가겠다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혼탁한 세상도 다시 밝아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알고, 십자가의 도를 삶으로 실천해 내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의 계절입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를 다시 우리 가슴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내가 죽어 너를 살릴 거야. 나를 비워서 너를 채워줄 거야. 벌은 내가 받을 테니까. 너는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라.’ 우리는 언제쯤이면 그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그 십자가의 돈을 조금이라도 실천해 내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 땅에 십자가의 도를 알고 십자가의 도를 실천해 내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이 민족은 다시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정확하게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정확하게 증언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1장 35절 같이 읽습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세례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세례 요한과 함께 서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 두 사람은 누구일까요?
요한복음 1장 40절을 보세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성경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안드레라 밝히고 있어요.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있어요. 그 사람은 누구냐 바로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입니다. 안드레와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36절과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세례 요한은 기꺼이 자기의 제자를 예수님의 제자로 이끌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매우 섭섭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기꺼이 자기의 제자를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두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 일꾼의 진정한 태도를 배웁니다.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 사람 만들려고 하고, 어떻게 하든지 내가 박수 받으려고 하고, 내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고, 내가 모든 관심의 대상이 되려고 하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 일꾼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 마음, 그런 태도는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기꺼이 자기의 제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했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올바른 삶의 태도를 만들고, 올바른 신앙은 올바른 섬김의 태도를 만들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았고 자기 섬김의 태도도 분명하게 알았던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때로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할 때, 그때 섭섭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열심히 섬기고 봉사했는데 사람들이 몰라줄 때, 그때도 여러분은 섭섭해하지 않는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인격이 그 정도는 되어야겠습니다. 저의 사명도 여러분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저의 사람으로 만드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저는 삯꾼 목자잖아요. 저의 사명은 여러분을 다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구역장의 사명도 마찬가지로 자기 사람 만드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 만드는 사명이에요.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의 사명도 자기 제자 키우는 거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주일학교 교사들의 사명이에요. 모든 일꾼의 사명은 그렇습니다.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집중시키고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드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 일꾼의 본분이요,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제가 보면 우리 교회에 참 귀한 일꾼이 많아요. 어렵고 힘들 때 남전도회, 여전도회 임원을 맡아서 열심히 충성하고 섬기고 봉사해요. 회원들이 많지 않을 때 정말 두 손 걷어붙이고 열심히 섬기고 봉사해요. 그러다 해가 바뀌어서 임원진이 새로 구성됐는데 갑자기 총무로 섬기던 분이나, 회계로 섬기던 분이나, 서기로 섬기던 분이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어요. 그러면 섬길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이미 회장으로 다 섬기고 봉사했지만, 그 자리를 채우는 거예요. “제가 총무로 섬겨보겠습니다.” 이미 회장 다 했지만, “제가 회계가 되어서, 제가 서기가 되어서 제가 부족하지만 계속 섬겨 보겠습니다.” 그런데 회장할 때보다 서기, 총무, 회계할 때 더 열심히 섬겨요. 참 귀한 분들이, 진실한 하나님 나라 일꾼들이 그만큼의 신앙 인격을 가지고, 그만큼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에요.
내가 빛나는 자리에 있을 때만 충성하는 거 아니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 있을 때도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섬길 수 있는 믿음과 신앙의 인격, 그게 축복인데 세례 요한은 그런 믿음과 인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제일 큰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성도 중에 그런 분이 많아요. 그래서 제가 참 기뻐하고 제가 늘 감사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 당시 인기 절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저 사람이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따르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러나 세례 요한은 기꺼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어요. 거기에 인간적인 계산은 없었어요. 오직 하나님 나라의 일꾼에 참된 믿음과 정신만 있었던 거예요. 세례 요한은 기꺼이 자기가 주인공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아닌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워드렸습니다. 사람의 일생을 살면서 나 때문에 누군가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워지고,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진다면,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어요.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어요.
어느 집사님이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서 초등학생들을 맡아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년 동안 열심히 가르치고 이제 그 아이들과 헤어졌어요. 그렇지만 한번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아이들을 평생 나의 제자로 마음에 품고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드려야지 하는 마음이 있어서 늘 기도했어요. 1년 동안 가르치고 이제 해가 바뀌어서 주일학교 아이들이 성장하고 다른 반으로 갔지만 계속 기도하신 거예요. 20년을 넘게 기도했어요. 그렇게 20년을 넘게 기도한 제자 중 하나가 신학대학에 입학해 신학 공부를 하더니 나중에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그리고 선교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파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제자가 선교사로 파송되는 그 예배에 참석했어요. 얼마나 마음이 뜨거운지, 20년을 기도했으니까 그 마음이 얼마나 뜨겁겠어요. 축복하며 기도했어요. 가슴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쏟아져 내렸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았어요.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통해서 오늘 나의 신실한 종 하나를 얻었다. 참 고맙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로해 주시는 것 같았대요.
여러분 그 은혜가 얼마나 기뻐요. 여러분도 그런 인생을 살고, 여러분도 그런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나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건 축복이고, 나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진다는 것보다 더 가슴 벅찬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누군가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여러분 때문에 누군가가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는 놀라운 은혜, 신령한 축복이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남은 인생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그때 목사님 되는 게 꿈이었어요. 장래 희망이 목사님이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저에게는 특별한 만남의 복이 있었습니다. 별명이 ‘교회 할머니, 교회 할아버지’인 집사님 부부가 있었어요. 늘 교회를 섬기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교회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그렇게 사니까 동네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 ‘교회 할머니, 교회 할아버지’였어요. 그분들이 저를 위해 평생을 기도해 주셨습니다. 교회 할아버지는 새벽마다 교회 종을 치고 주일마다 교회 종을 쳤어요. 교회 할머니는 새벽마다 밤마다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서 담요 한 장 뒤집어쓰고 늘 온 동네 사람을 위해서 축복하고 온 동네 아이들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하는 분이었어요. 그분들이 저를 위해 평생을 기도해 주셨습니다. 교회 할머니는 날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는데 제가 중학생, 고등학생 때 교회에 가면 깍듯이 저를 맞이해 줬어요.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이 오셨네.” 제 꿈이 목사님이라는 걸 아시니까 그렇게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합격하고 며칠 뒤 날씨가 특별히 추운 날이었어요. 그런데 교회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시고 마을 언덕을 넘어서 아랫마을로 가시는 거예요. 우리 마을로 들어오려면 언덕을 하나 넘어서 와야 해요. 그 언덕길을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넘어가시는 걸 제가 봤어요. ‘저 할아버지가 어딜 가시나?’ 했어요. 한 시간이 더 지나서 그 추운 날 교회 할아버지가 저의 집으로 오셨어요. 신문지를 둘둘 말아놓은 돈뭉치를 저에게 주시면서 “백 선생, 신학대학 등록금이네”라며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백 선생, 고맙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예요. 저는 그때 스 할아버지의 손주보다 더 어렸죠. 그런데 저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분들을 잊을 수 없어요. 장로님과 권사님이 충분히 되고도 남을 분들인데 시골 교회 성도가 몇 분 안 되니까 그저 평생을 집사님으로 섬겼지만, 그분들의 삶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삶이었고, 오늘의 저를 만든 귀한 분들입니다. 제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서서 여러분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그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셨던 저의 부모님들이 계셨기 때문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하고, 뒤에서 격려하고 박수 쳐 주고, 조금 잘하면 잘한다고 칭찬해 주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는 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어서 저도 이 자리에 서 있는 거예요. 저 혼자 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나라 일꾼을 세우는 일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눈물과 기도가 필요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오늘 저의 삶이, 여러분의 삶이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드리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보다 더 귀한 삶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39절 말씀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다음은 예수님이 하세요. 와서 보라. 우리 예수님은 “와서 보라” 보여주는 것으로, 실제로 만나주시는 것으로 제자로 세우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은 언제나 성경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말씀 신앙에서 출발해야 해요. 신앙은 말씀 신앙에서 출발해야 해요. 말씀 신앙에서 출발한 신앙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 처음 신앙으로 성숙해지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번 성탄의 계절에 특별히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만나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이세요.
마태복음 18장 20절 같이 읽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 주님을 만나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예배 자리, 기도 자리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요.
마태복음 28장 20절도 같이 읽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어디서 주님을 만나요? 사명 감당하는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 지고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요. 십자가가 힘들어 보여도 사실은 십자가가 우리를 살려요.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보면 내 옆에서 나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만나게 돼요.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몰라요. 우리의 남은 생애가 사명 감당하는 삶이 되고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장 40절부터 42절까지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안드레를 예수님께 인도했어요. 또 안드레는 자기 형제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어요.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부흥하고 발전합니다. 여러분도 안드레처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성탄감사예배는 여러분에게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어요. 주위에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을 위해 기도하고, 용기를 내어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내가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예배 자리에 나오는 그런 은혜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가정에 허락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안드레처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확신하며 전하는 거예요. 전하면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고쳐주셨어요. “네 이름이 시몬이니 앞으로 너의 이름을 게바라 하라.” ‘시몬’은 ‘듣다, 응답하다’라는 뜻이고 이 시몬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게바’로 고쳐주셨어요. ‘게바’는 아람어 이름인데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이 아람어 이름 게바를 헬라식으로 바꾸면 ‘베드로’가 돼요. 예수님은 시몬을 게바(베드로)로 이름을 고쳐주셨어요. 유대인들은 히브리식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선민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식 이름을 좋아해요. 그래서 베드로의 원래 이름이 히브리식 이름인 ‘시몬’입니다.
시몬을 조금 연구해 보면 아마도 ‘쉐마(듣다)’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쉐마의 뜻은 ‘듣다, 듣고 순종하다’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시몬이라고 지을 때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라.’ 아마 그런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시몬이라고 지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이 시몬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시몬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귀가 얇은 사람,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으로도 의미가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틱하게 성경을 해석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설명해요. ‘시몬이란 이름의 뜻은 갈대다. 귀가 얇아 이랬다저랬다 하는 갈대다. 그런데 그 갈대를 게바(반석)로 고쳐주셨다. 그렇구나! 오리 주님은 갈대를 반석으로 고치시는 분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사람들이 ‘와’ 하고 아주 좋아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실제로 많은 목사님이 그렇게 해석했어요. ‘예수님은 시몬, 갈대를 반석, 베드로로 이름을 고쳐주셨다. 여러분은 갈대가 되지 말고 베드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막 좋아하거든요. 여러분,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너무 드라마틱한 성경 해석을 좋아하면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좀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누가, 어느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자식의 이름을 갈대라고, 귀가 얇은 놈이라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름을 짓겠어요? 자식을 낳아 그 이름을 ‘너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을 살아라. 박갈대, 이갈대, 최갈대’, 그렇게 짓는 사람 누가 있어요? 시몬이라는 이름의 뜻이 갈대였는데 베드로, 반석으로 고쳐주셨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누가 그렇게 이름을 짓겠냐고요?
원래 시몬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라’ 아마도 그런 뜻이었을 텐데 예수님께서 게바로 고쳐주셨습니다. 게바, 반석은 헬라어로는 베드로인데 아마도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되는 신앙고백을 했잖아요.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게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게바라는 이름,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사명도 주시고 새 이름 베드로, 게바라는 이름도 주셨어요.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이름도 주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정치판도 새로워져야겠고, 국민 정서도 새로워져야 되겠고, 이 나라 모든 것이 새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자꾸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 이 민족 가운데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저는 그렇게 기도해요. 여러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새롭게 하시는 은혜는 어디에 있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는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이 땅에 올 수 있을까요?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새롭게 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은혜 위에 은혜로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온전히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늘에는 영광을, 땅에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닮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이 민족을 살리는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 땅에 충만하기를 기도하고, 우리 믿는 사람들이 더 예수님 닮은 삶,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이 민족을 살리는 길임을 여러분 분명히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이 나라를 살려야겠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라는 슬픈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제국에 무참히 유린당했습니다. 신사 참배를 강요당하고, 영혼도 정신도 유린당했어요.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가고, 교회 지도자들도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이 나라 곳곳이 병들었어요. 이어서 우리는 6.25전쟁으로 우리 민족이 완전히 폐허가 된 역사적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어린아이들은 고아가 되었고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폐허의 땅 위에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선교사님들을 통해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고, 학교가 세워졌으며, 병원이 세워졌을 때 이 땅에 기도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다 무너졌던 민족인데 세상 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할 만큼 이 민족이 이렇게 일어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진 지하자원이 많습니까? 한국 사람들 머리가 똑똑하다고요? 제가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저 인도 사람들, 유대인들의 머리가 더 똑똑하더라고요. 무엇으로 한강의 기적을 설명할까요? 땀 흘려 노력했기 때문에? 물론 우리 선조들이 땀 흘려 노력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이 민족의 부흥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부흥과 함께 찾아온 하나님의 은혜예요. 교회의 부흥과 함께 이 민족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 민족의 위기는 정치적인 위기보다 교회가 타락해 가는 것이 위기예요. 다원주의에 물들어서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 위기요, 교회가 거룩성을 상실해 가는 것이 위기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아져 가는 것이 위기예요. 이 문제를 해결하면,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면 이 민족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광야에도 길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막에도 강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 민족이 다시 살아날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만 우리는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세상의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하신 주님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실천해 내지 못했습니다.” 우리 그렇게 가슴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세계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부흥은 복음의 부흥이요, 교회의 부흥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와서 우리 민족이 너무 빨리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배은망덕하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와 세속화의 공격 앞에 하나님도 거부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 민족의 위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위기요, 순수 복음을 지키지 못하는 교회의 위기입니다. 거룩성을 지키지 못한 교회의 위기입니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면 이 민족이 분명히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우리나라가 우리 힘으로 이만큼 잘사는 나라가 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복음의 부흥으로 이 민족이 부흥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좀 더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메시야를 만났다! 나는 예수님을 만났다!” 그렇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대로 십자가의 도를 가슴에 품고 조금이라도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어 내가 사는 그 어느 언저리에 조그마한 소망의 불빛이라도 비추어 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민족 가운데 하나님께서 다시 긍휼을 베푸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부흥이 일어나면 이 민족은 분명히 다시 살 수 있습니다. 믿고 이 성탄의 계절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