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요한복음 1:43~51)
예수님은 제자를 찾으십니다. 제자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제자를 찾으시고 부르시며 그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기쁨도 영광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서 예수님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라도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장 4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빌립을 만나서 “나를 따르라” 하시며 제자로 불러 세웠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구약성경에 예언한 메시야 바로 그분이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나다나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나사렛 예수 그분이 메시야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심에 틀림없다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다나엘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6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믿지 못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나다나엘은 자기의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 자기 지식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했어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나사렛은 천한 동네인데 무슨 선지자라니, 메시야라니 말도 안 된다. 나다나엘은 믿지 못했습니다.
갈릴리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 북쪽에 갈릴리 호수라고도 하고 갈릴리 바다라고도 하는 큰 호수가 있죠. 이스라엘 북쪽에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가버나움이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곳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율법을 낭독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어요. 가버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 아래 서쪽으로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예수님의 동네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수님의 동네 나사렛과 가버나움이 있는 갈릴리의 평판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동네 나사렛과 가버나움은 평판이 좋은 동네는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9장 1절을 같이 읽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사는 땅, 이방인의 땅과 같은 갈릴리라 해서 이방의 갈릴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BC 722년 앗수르제국이 북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갈릴리로 들어왔습니다. 갈릴리에는 물이 넉넉하잖아요. 갈릴리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길목입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적군이 침입해 들어올 때는 갈릴리로 들어와요. 다 빼앗고, 짓밟고 지나가죠. 북 이스라엘을 정복하려고 앗수르제국이 침입해 들어올 때도 갈릴리로 들어와서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정복했어요. 갈릴리는 찬탈당하는 땅, 짓밟히는 땅이었어요. 그야말로 성경에 표현한 대로 흑암의 처한 자들이 살아가는 땅이죠.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당시 갈릴리 사람들도 멸시 천대를 받았습니다. ‘너희는 혼혈이야. 정통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야.’ 사마리아 사람들도, 갈릴리 사람들도 그렇게 멸시 천대를 받았어요. 빼앗기고 찬탈당하면서 사는데도 멸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BC 586년에는 바벨론제국이 남 유다를 정복합니다. 바벨론제국의 군사들도 갈릴리로 들어왔습니다. 거기로 와야 물이 넉넉하니까, 거기가 길목이니까 바벨론제국이 남 유다를 정복할 때도 갈릴리로 들어와서 예루살렘을 집어삼키고 예루살렘을 정복했어요. 그렇게 갈릴리는 늘 짓밟히는 땅, 착취당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손가락질 당하는 땅이었죠. 그래서 이방의 갈릴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도 그 당시의 그런 상황 속에 있었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사렛에서 무슨 메시야가 나와?’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나다나엘은 율법을 많이 알고, 율법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나다나엘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지식 때문에, 자기 선입견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는 자기 지식 때문에, 자기 생각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은 자기 선입견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했어요.
오늘날에도 나다나엘을 닮은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지식으로 비추어 보니 예수님을 메시야로, 나의 주님으로 못 믿겠다는 거예요. 스스로를 똑똑한 줄 아는 사람이지만 한없이 어리석은 사람이죠.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으로 오셨어요.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어요. 모든 흑암에 앉은 자들의 구주가 되시려고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으로, 낮고 낮은 곳으로 오셨어요. 그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모르는 겁니다. 바로 자기의 교만한 생각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는 자기 지식 때문에 낮은 곳으로 오신, 만민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자기 비하를 통해서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모르는 거예요.
마태복음 4장 12절부터 14절까지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갈릴리 사람으로 오셨어요. 갈릴리 사람들의 구주로 사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구원의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1절도 함께 읽습니다.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어요.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로 불리는 것을 예수님은 기뻐하셨어요.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주님, 억눌린 자들의 주님, 희망 없고 소망 없는 자들의 주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9절도 같이 읽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우리의 죗짐을 다 짊어지시고 죽으실 때도 이름표를 다셨는데 ‘나사렛 예수’라는 그 이름표를 다셨습니다. 만민의 구주, 모든 억눌린 자들의 주님, 모든 흑암에 앉은 자들의 주님, 가난한 자들의 구주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 그 이름표를 다시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죗짐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속하시고 속량하셨습니다.
사도행전 3장 6절도 같이 읽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이 병든 자들을 고치고 하반신장애인을 일으켜 세우는 거예요.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이 우리를 살리는 우리 주님의 이름이에요. 나사렛 예수, 그분의 이름은 사망의 그늘이 진 땅에 거하는 모든 백성에게 구원의 빛이 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셨고, 갈릴리 사람으로 사셨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 되지도 않은 알량한 지식으로 그 예수님을 거부하는 거예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와? 무슨 선한 것이 나와?’ 예수님을 처음엔 믿지 못했다는 거예요. 얼마 되지도 않은 우리의 지식,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 이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선입견이라는 거예요. 나의 편견이라는 거예요. 생각의 교만이라는 거예요.
우리 생각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과연 진실한가, 내 생각이 옳은가?’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을 날마다 검증하고 진단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은 항상 옳다는 생각의 교만을 버려야 해요. 생각의 교만이란 함정에 빠져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편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교만이 문제입니다. 교만은 그래서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망치고 이웃을 망쳐요. 나라도 망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만이라는 것, 특별히 생각의 교만이라는 것을 버려야 해요. 자기 생각, 자기 신념,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합당한지를 날마다 다시 생각하고, 다시 돌아보고, 다시 점검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의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들,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걸 못 버리니까 폭군이 되고 저주의 통로, 심판의 통로가 되어서 온 나라 백성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까? ‘내 생각은 항상 옳다’는 이 생각의 교만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의 교만은 너무나 위험해요.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7절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칭찬하셔요. 아직 메시야로 예수님을 믿지도 못하는 나다나엘인데,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세요. “이 사람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렇게 칭찬하시죠. 그 이유는 바로 나다나엘의 중심에는 간사한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칭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나다나엘에게는 간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여기 간사한 것이란 모든 거짓된 것을 가리킵니다. 속임수를 말합니다. 교묘하고 교활한 것을 말해요. 나다나엘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이 사람 나다나엘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이렇게 칭찬하셨어요.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정직의 가치, 진실의 가치를 얼마나 크게 보시는지 알아야 해요. 나다나엘도 편견이 있었잖아요. 예수님 못 믿었잖아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와?” 이런 소리 했잖아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나다나엘을 가리켜 이 사람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어요. 그 이유가 간사한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도 아직 뭘 모르긴 해도 진실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정직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은 진실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해요.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해요. 그다음에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짓된 것이 있는지, 진실한 것이 있는지, 그걸 보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믿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을 보실 때 우리 속에도, 내 안에도 나의 숨겨진 삶에도, 거짓된 것, 모든 종류의 간사한 것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을 칭찬하세요. 아직 뭘 좀 모르고 아직 좀 부족해도 마음이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 능력은 좀 부족해도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세요. 그런 사람을 인정하세요. 그런 사람을 제자로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죠? 이제 대학 졸업하고 곧바로 어느 건설회사에 들어갔어요. 젊은 나이에 건설회사에 들어가서 평생을 그 회사를 위해 충성했어요. 한평생 그 건설회사에서 일하고 이제 퇴직할 때가 다 됐어요. 그런데 회사 대표가 부르시는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집을 한 채 지어 달라는 거예요. 경치는 좋아 보이는데 좀 외딴 곳에 집을 하나 지어 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에 화가 나려고 해요. ‘내가 평생 이 직장에 들어와서 쉬지 않고 일했는데, 이제 퇴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또 이렇게 나에게 일을 맡기고, 하여튼 나를 이렇게 못 부려먹어서 안달이구나.’ 그렇게 화가 나더래요. 그래서 집을 건축하는데 그냥 대충대충 했대요. 이게 부실공사가 아닌가 싶어도 그냥 눈 딱 감고 대충대충 짓고 말았대요. 집을 다 짓고 나니 사장님이 다시 오라고 불렀대요. 갔더니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당신이 평생 젊은 나이에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너무너무 고생하고 충성한 걸 내가 알아요. 그래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지은 그 집은 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그랬다는 거예요.
간교한 사람은 간교한 열매를 자기가 먹어요. 간사한 사람은 간사한 열매를 자기가 먹어요. 진실한 사람은 진실의 열매를 자기가 먹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믿음이 정확하고 진실해야 되겠고,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삶이 정직한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땅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정직한 사람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결국에는 무너집니다. 지켜보십시오. 도덕적 우위를 상실한 사람은 결국에는 무너져요.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결국은 잘되게 돼 있어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폭군이 되죠. 폭력적인 사람이 되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죠. 그런 사람은 자기도 망치지만 나라도 망치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은 다 보고 계세요. 지난 한 해를 살면서 여러분 어떻게 사셨습니까?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고 노력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잘 사신 거예요. 돈을 조금 못 벌었어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려고 그래도 노력했다면, 여러분 잘 사신 거예요. 내 남편이 돈은 못 벌어다 줘도, 옆집은 남편이 돈도 잘 벌어다 준다더만 내 남편은 어쩌면 이렇게 돈 버는 재주가 없는지, 돈은 못 벌어다 주고 그래도 내 남편이 사람 하나는 정직하다 그러면 그 남편이 최고입니다. 내 남편이 돈 많이 벌어다 주면 좋지만 혹 그렇지 못해도 사람 하나는 정직하다 그러면 그 남편이 최고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입학했는데 첫 시험을 치는데, 떨리잖아요. 교수님이 들어오시더니 칠판에 ‘코람 데오(Coram Deo)’라고 적었습니다. 학교의 교훈이니까 우리 다 알고 있었죠. 그게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 ‘하나님 앞에서.’ 칠판에 그거 적어놓고 문제지 나눠 준 뒤 나가버렸어요. 한 사람도 부정행위 하는 사람 없었어요. 할 수가 없었어요. 목사 되겠다고 신학대학에 들어온 사람들인데 ‘코람 데오’ 그 말씀 한마디 앞에서 어느 누구도 부정행위를 하는 사람이 없고, 할 수도 없었어요.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굳게 결심하고, 아무리 굳게 결단해도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온전히 정직하고 진실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면 우리도 정직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의지만로는 안 돼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면 되는 거예요. 나다나엘도 그랬습니다. 나다나엘이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 거짓된 것이 없는 사람,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 그 당시 율법학자, 랍비들은 말씀을 가르치거나, 율법을 가르치거나,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자주 찾았던 곳이 무화과나무 밑이라고 해요. 아마도 이 나다나엘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하며 기도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다나엘을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요, 하나님 말씀의 은혜인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마음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만 보고 예수님이 이 사람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셨을까요?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시편 97편 11절 같이 읽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들을 위해 기쁨을 뿌려주셔요. 하나님께서 새해에는 정말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우리나라 우리 민족 가운데 기쁨을 많이많이 뿌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쁨을 크게 뿌려주시기를 원하시면 큰소리로 “아멘” 합시다! 새해에는 정말 하나님께서 이 민족 가운데 큰 기쁨을 뿌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보이스피싱으로, 거짓으로 교묘하게 간교하게 속이고 사기 쳐서 남의 돈 빼앗아 먹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구를 좀 떠나게 했으면 좋겠다. 저는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해요. 보이스피싱 당해서 피눈물 흘리는 시골의 할머니들 얼마나 가슴이 아파요. 우리나라가 잘되려면 법이 좀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과 전쟁을 선포할 게 아니고 모든 거짓과 전쟁을 선포해야 해요. 나라가 잘되려면 법이 강해져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사기 치고 거짓말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벌을 무겁게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잘되려면 그래야 해요. 모든 거짓된 것을 자꾸 없애가야 해요. 그래야 나라가 잘되는 거예요. 세상에 어디 공부할 게 없어서 ‘어떻게 하면 남 잘 속여 먹을까’, 그런 공부를 해요? ‘어떻게 하면 의심받지 않게 사기 치는 목소리를 만들까’, 어떻게 그런 걸 연구하느냐고요? 하나님 앞에 가면 행한 대로, 행위대로 다 심판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 앞에 가서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모든 거짓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잠언 11장 11절도 같이 읽습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성읍은 정직한 자들이 많아야 잘돼요. 나라도 정직한 사람이 많아야 잘돼요. 그리고 정직한 사람들이 축복을 많이 해야 나라가 잘돼요. 우리나라가 잘되려면 이 땅에 하나님 앞에 정직한 믿음의 사람들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한 믿음의 사람들은 축복을 해야 해요. 그래야 나라와 민족이 잘되는 겁니다.
광화문에 나가시는 분들 있잖아요. 그분들은 저보다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진심입니다.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면 이 추운 날 그 광화문에 나가서 그렇게 버티고, 그렇게 자기 몸 버티기 힘든 데도 이겨내고 거기 집회에 참여하나? 이거예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말 그분들이 저보다 나라를 더 사랑하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진심이에요. 어느 쪽에 있든지 간에 저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분들이다. 참 대단한 분들 귀한 분들이다. 그렇게 생각해요. 나라가 속히 안정되어서 그분들이 좀 가정에서 편히 쉴 수 있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요. 나라가 잘되려면 정직한 사람이 많아야 한다. 나라가 잘되려면 정직한 사람들이 축복을 많이 해야 한 대요. 여러분, 우리가 정직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12편 2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참 감사한 것이 우리 교회에서 어린아이를 많이 볼 수 있다는 걸 참 감사하게 생각해요. 영아부실에 한번 가보세요. 지금 영아부실에 아이들이 아마 꼬물꼬물 기어다니고 그럴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유튜브에도 아이들이 많고요. 유년부와 초등부에도 아이들이 많아요. 중고등부 학생들, 우리 청년부도 힘 있게 일어나고 있어요.
요즘 보면 아이들이 다 예뻐요. 너무너무 예뻐요. 안 예쁜 아이들이 없어요. 그런데 제 눈에는 우리 다산은혜교회 아이들이 특별히 더 예뻐요. 여러분은 안 그래요?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너는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생겼냐?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생겼냐?’ 다 너무너무 예뻐요. 마음속에 이런 소원이 생기죠. ‘하나님, 이 아이의 앞날이 복되게 해 주옵소서. 이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복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 아이들의 세대,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세대가 되게 해 주옵시고, 우리 다음 세대가 우리보다 더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세대가 되게 해 주옵시고, 우리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더 하나님 앞에 복 받는 세대가 되게 해 주옵소서. 더 평화롭게 잘사는 세대가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 마음속에 이런 소원이 있어요. 그렇죠?
그럼 우리 어떻게 살아야 해요? 하나님 앞에서 더 정직하게 살아야 해요. 왜요? 성경이 말씀하잖아요.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다.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하나님 앞에 정직한 믿음을 회복해서 우리가 축복의 통로되고 우리 후손이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고 살게 되기를, 평화롭게 사는 나라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202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가야 해요. 던져버릴 것은 다 던져버리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송구영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오늘 들은 말씀에 비추어 보면 두 가지를 버려야 해요. 첫째, 생각의 교만을 버려야 해요.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려야 해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생각이 정말 옳은 생각인가, 성경의 거울에 비추어 날마다 점검해야 해요. 그 과정을 꼭 거쳐야 해요. 함부로 말하지 말고, 내 생각이 정말 하나님 말씀 앞에 비추어 합당한가? 내 생각이 정말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이게 정말 참으로 옳은가? 날마다 검증해야 된단 말이에요. 생각의 교만, ‘내 생각은 항상 옳다’ 이걸 버리고 가야 해요. 그리고 간사한 것, 모든 거짓된 것 다 버리고 가야 해요. 숨겨진 삶의 부끄러운 것 다 버리고 가야 해요. 하나님은 그걸 보셔요.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셔요. 간사한 것이 없구나. 정직하고 진실하구나. 하나님은 그걸 귀하게 보시는 거예요. 생각의 교만 버리고 가고 모든 거짓된 것 간사한 것 다 버리고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생각의 교만도 버리고 간사한 것도 다 버리고 나서 그다음 어떻게 해야 돼요?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믿음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생각의 교만을 버리고, 간사한 것을 버리고,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복을 받고, 가정이 복을 받고, 아들이 복을 받고, 딸이 복을 받고, 손주들이 복을 받고, 이웃이 복을 받고, 교회가 복을 받고, 우리 한국 교회가 복을 받고, 구역이 복을 받고, 전도회도 복을 받고, 우리 후손이 복을 받고, 우리 주일학교 아이들이 잘되고, 우리 청년들의 미래가 복되고, 우리 다음 세대가 형통하고, 우리 사랑하는 나라 대한민국도 다시 정국이 안정되고 복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힘든 세상 사시느라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 열심히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우리가 깨닫지 못했어도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다 보고 계셨던 예수님은 지난 한 해 여러분이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을 찾고, 그래도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고 발버둥 친 것을, 그렇게 여기까지 온 것을 예수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다 보고 계셨던 예수님은 여러분이 여기서 새벽마다 부르짖고, 주일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금요일 저녁에도 부르짖고, 두 손 걷어붙이고 저 힘든 주방에서 땀 흘리며 봉사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주차 안내로 차량 봉사로 또 차량 운전으로, 예배안내로 수고하고, 찬양대원으로 섬기고, 주일학교 교사로, 또 보이는 곳 안 보이는 곳 상관없이 충성하고 섬겨주신 여러분을 예수님은 다 보고 계신 줄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난 한 해 고단한 인생길이었지만 여러분과 함께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 저는 기쁘고 감사합니다. 저 혼자 걸어왔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여러분과 함께 걸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새해에는 정말 생각의 교만을 버리고, 모든 거짓된 것 간사한 것 다 버리고, 우리 능력은 좀 부족하고 힘은 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야지, 믿음으로 살아야지, 진실하게 살아야지, 그런 마음의 각오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더 겸손하고 더 정직하고 더 진실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까닭에 우리 한국 교회에,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우리 후손에게 정직한 자들에게 뿌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정직한 자들의 앞날에 뿌려주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