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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거듭나야 합니다(요한복음 3:1~8)

  • 박재역
  • 2025.01.12 오후 08:10

니고데모는 경건한 바리새인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유대교의 선생입니다. 학자이기도 하고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입니다. 아주 지체 높은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니고데모는 부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을 왜 찾아갔을까요?

 

요한복음 32절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알고 믿었습니다. 밤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왜 밤에 찾아갔을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싶었고, 예수님과 좀 개인적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며, 방해받지 않고 만나고 싶어서 아마도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대교를 대표하는 지체 높은 사람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로서 갈릴리 나사렛 목수 출신인 예수님을 먼저 찾아간 것도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 나이도 분명 니고데모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세상적으로는 지위나 학식이나 경륜이나 경험 등 모든 면에서 니고데모가 더 높은 위치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서 랍비여라고 말합니다. 랍비라는 말은 나의 스승, 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유대교의 최고봉에 있었던 니고데모가 나이도 어리고 그 당시 세상적인 지위로 봤을 때는 훨씬 낮은 사람인데, 예수님을 찾아가서 랍비여, 나의 스승이여, 나의 주인이시여!” 이렇게 불렀단 말입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매우 특이한 일이고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니고데모는 분명히 겸손한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분명히 진리를 향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귀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칭찬하지 아니하셨어요. 냉정하고 냉랭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3절입니다. 같이 읽읍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한다.’ 이는 원어로 아멘 아멘 레고 소이(αμην αμην λεγω σοι)’인데요. ‘아멘 아멘(진실로 진실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도 지금 이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너도 거듭나야 하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멘 아멘(진실로 진실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너무나 너무나 귀하다는 거예요.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많이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말씀 가장 복된 말씀을 니고데모에게 또박또박 들려주셨으니 그 말씀이 니고데모야, 너도 거듭나야 하느니라. 거듭나야 참 이스라엘이고,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느니라.” 이 귀한 말씀을 들려주셨어요. 거듭나는 것, 거듭남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최고 지도자라도 거듭나야 한다.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 다 거듭나야 하고, 가진 사람이나 덜 가진 사람 다 거듭나야 하고, 지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상관이 없다. 다 거듭나야 한다.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너에게 말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만큼 거듭나는 것은 중요해요. 거듭남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모르면 사실은 성경을 모르는 겁니다. 이 말씀을 모르면 사실은 예수님을 모르는 거예요. 이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말씀 중에 오늘 말씀은 특별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깨달아 아는 지혜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공부할 자신이 있습니까? 조금 어려울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정신을 집중해서 오늘 말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3절에서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는데, 여기 거듭남이라는 말씀을 원어로 보면 겐네테 아노텐(γεννηθη ανωθεν)’입니다. ‘낳다, 생산하다는 의미의 겐나오(γεννω)’라는 동사의 부정시제 수동형입니다. 수동형이라는 것만 기억합시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는 일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사람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동적 행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이뤄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아노텐(ανωθεν)’이라는 말은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롭게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한글 성경에 거듭남으로 번역한 겐네테 아노텐(γεννηθη ανωθεν)’이라는 표현을 영어 성경에는 본 어게인(born again, 다시 태어남)’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본 프럼 어보브(born from above, 위로부터 남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은혜로,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 안에서 사람이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롭게 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거듭남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는 일이라는 부분까지는 이해가 될 거예요. 그런데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롭게 난다는 게 뭘까?’ 이게 이해가 안 된단 말이죠. 그러면 성경을 보고 또 보면 돼요. 본문을 해석할 때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해요. 성경은 그 본문의 문단과 문맥 안에서 풀면 돼요.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풀면 풀립니다.

 

요한복음 33절을 다시 보세요. 우리 한 번 더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아니하면’, 거듭남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35절을 우리 같이 읽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 말씀의 다른 표현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이 말씀이란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설명하셨어요.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나는 건 뭘까? 결론을 말씀드리면 성령세례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외적인 확정입니다. 세례는 씻는 거예요. 깨끗하게 씻어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죠. 물에 들어가서 안 죽고 살 사람이 있나요? 세례 받을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요단강 물속에 풍덩 담갔다가 꺼내는데, 물에 들어가서 안 죽고 살 사람 없죠? 세례 받는 것은 옛사람이 죽고 새롭게 난다는 거예요.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고린도전서 12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죠. 우리는 주님!” 이렇게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잖아요. 이게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못 불러요. 자기는 못 부르겠대요. 안 믿어진대요. 성령님이 역사하지 아니하시니까 못 믿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입으로 주님으로 시인하게 된 것, 이미 성령님이 나에게 임하신 증거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내 속에 내재하시는 증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게 된 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게 성령세례 받은 것입니다. 무슨 방언을 하고 신비한 능력을 나타내고, 그게 성령세례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성령님이 이미 임하신 거예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주님으로 부르고, 시인하고, 그 믿음으로 세례 받았다면, 여러분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 여러분은 물과 성령으로 난 사람인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세례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 받고 새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예수님을 믿어 전 인격이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해요.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새사람이 되는 것인데, 신분이 바뀌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이 바뀌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세례 받고 전 인격이 새사람 되고,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뀌는 것을 말해요.

오늘 이 말씀은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모르고 예배시간에 앉아 있는 사람,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은총 가까이 있으면서 구원을 못 받는 사람, 가장 불쌍한 사람이죠. 그야말로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내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속량하셨다는 사실을 믿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 성령세례 받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솔직히 나는 지금 교회는 나오고 있지만 솔직히 예수님이 안 믿어진다. 솔직히 나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분이 계신가요?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어요. 솔직해져야 해요. 아직 내가 예수님 믿는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모해야 해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언제 어떻게 주시나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이 믿음을 심어주셔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해요. 또 성경 말씀을 잃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우리 속에 믿음이 생겨요 말씀의 열매로 우리 속에 믿음이 생기고 자라는 거예요.

지난 주간에도 우리 교회 참 귀한 집사님 한 분을 천국으로 보내드렸어요. 이 세상에서는 이제 다시 뵐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하고, 마음이 아프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어요. 이유가 뭐냐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분명한 분이었기 때문에 천국 가는 거 걱정이 안 돼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보면 사람들이 뭔가를 붙잡으려고 그래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다가 눈 감기 전에 몸을 움직이고 뭘 붙잡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람은 손잡아 줄 수 없어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손잡아 천국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 이름의 뜻은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람은 우리 손 못 잡아줘요. 예수님만 우리의 손을 잡아주셔요. 예수님은 믿음의 백성을 버리지 않아요. 끝까지 천국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성도의 견인이라는 은혜로 끝까지 우리를 구원하세요. 끝까지 우리의 손을 잡아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가시는 분, 그 이름 예수, 그 이름이 우리를 살리는 권세 있는 이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은 없어요.

 

요한복음 37절과 8절 우리 같이 읽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지난 주간 특별새벽기도 오는데, 바람이 부니까 더 춥더라고요. 그런데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바람이 분다는 것은 알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영으로 나는 것도 그와 같다. 성령님의 역사도 그와 같다. 성령님은 바람처럼 불처럼 일하신다.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는데, 바람이 분다는 걸 느끼잖아요. 성령님이 어디서 어떻게 오시는지 모르는데, 성령님이 내 속에 역사하시는 걸 느껴요. 3분 정도 기도했구나 생각하고 눈을 떴는데, 이미 3시간이 지났어요.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기도하게 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고, 지은 죄가 생각나서 회개하게 되고, 가슴이 뜨거워져 눈물이 쏟아져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데 어디서 어떻게 나에게 역사하시는지 모르지만 성령님은 분명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요.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님은 그렇게 역사하셔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성도는 바람처럼 불처럼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올해 여러분의 믿음이 더 굳세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정말 영접하지 못하고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는 분이 계신다면 성령님이 바람처럼 불처럼 역사하셔서 여러분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고 거듭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위로부터 난다는 말씀, 이 말씀을 우리가 공부해야겠습니다.

 

요한복음 331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위로부터 오시는.’ 여기 위로부터라는 말씀이 아노텐(ανωθεν)’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노텐이라는 단어의 1차적인 의미는 위로부터입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49절을 보면서 이 단어의 의미를 비교해 볼 수 있어요.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여기 다시는 다른 단어예요. 원어로 팔린(παλιν)’입니다. ‘팔린 아노텐(παλιν ανωθεν)’다시 처음부터라는 뜻이에요. 우리 한글 성경에 거듭나지 아니하면거듭이라는 단어로 번역한 부사 아노텐(ανωθεν)’은 대부분 위로부터, 위에서부터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마태복음 2751절의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여기 위로부터도 거듭난다는 말 아노텐(ανωθεν)’이에요. 야고보서 117절의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여기 위로부터도 거듭난다고 표현할 때 쓰는 그 단어 아노텐(ανωθεν)’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글 성경에 거듭남이라고 번역한 겐네테 아노텐(γεννηθη ανωθεν)’의 의미는 위로부터 태어난(born from above)’을 의미합니다.

성경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습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남(born again)’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위로부터 남(born from above)’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으로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문맥의 정황을 따라 보면 위로부터 태어남(born from above)’을 선호한다.”

성경학자 D. A. 카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 거듭남(ανωθεν)’이라는 단어를 위로부터다시둘 다 의미하는 이중적 의미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거듭남은 위의 영역에서 오시는 성령님의 역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아노텐(ανωθεν)’이라는 단어는 위로부터를 의미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나다와 같은 의미여야 한다.”

거듭남하나님의 은혜로, 위로부터 처음부터 완전히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본 어게인(born again)’은 아니에요.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 받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 된다. 완전히 인격이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의미에서 ‘born agai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 프롬 어보브(born from above)’, 위로부터 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할 것입니다. 어려운 말이지만 성경을 좀 깊이 연구하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거듭남을 왜 위로부터 나는 것으로 표현했을까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노력으로는 거듭날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오직 위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에요.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지 보통 생육법으로 나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나셔서 죄가 없는 분이에요.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신 분인데 사람의 모양으로 낮아지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에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위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구원받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롭게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영생은 예수님께서 위로부터 가져다주신 것이기 때문에 땅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빼앗을 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그 어느 누구도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39절 같이 읽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거듭난 사람, 물과 성령으로 난 사람, 성령세례 받은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에게는 공통 특징이 하나 있어요. 삶의 방식에 변화가 생겨요. 그게 뭘까요? 이전에는 죄짓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거듭난 이후에는 죄짓지 않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으로 변화돼요. 놀라워요. 이전에는 죄 짓고 들키지 않으면 나는 운도 많다. 나는 복도 많다 생각했지만, 그거 틀려먹은 생각이에요. 거듭난 사람은 죄짓지 않고 하루를 정결하게, 깨끗하게 사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좋아. 이렇게 달라지는 거예요. 이렇게 새사람 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이렇게 새사람 되는 증거가 더 분명하게 나타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전에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매여 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고 남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거예요. 그런 변화가 생기는 거예요.

 

거듭남의 이야기를 하면 김익두 목사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어요. 사람들이 장날만 되면 빌었대요. “안악골의 호랑이 김익두만 좀 안 만나게 해 주세요. 그는 막나니입니다. 좀 안 만나게 해 주세요.” 늘 술에 찌들어서 살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때리고, 폭행하고, 돈 빼앗고, 그런 사람이 김익두라는 사람이었대요. 그런데 그 김익두가 스왈른(Swallen, 한국 이름 소안련)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요. 그래서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로 나요. 물과 성령으로 성령세례를 받고 새사람이 돼요. 너무 가슴이 뜨거워서 전도하는 거예요. 집집마다 가서 전도하는데, 어느 집에서는 너무 계속해서 전도하자 그 집 아주머니가 화가 나서 제발 좀 꺼져라하며 설거지한 구정물을 확 부어버렸대요. 김익두 목사님은 김익두가 죽었기 때문에 당신이 오늘 살았습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당신은 오늘 죽었습니다. 내가 죽어서 당신이 살았습니다라고 했답니다.

또 산을 넘어 다른 동네로 전도하러 가는데 나무 밑에 잠시 앉아서 쉬었대요. 나무 밑에 잠시 앉아서 쉬는데, 술을 마신 남자가 오더니 비키라고, 내 자리라고 발길질하고 사정없이 때리더래요. 그러니까 김익두 목사님이 다 맞았대요. 맞고 나서 그다음에 하는 말이 형님 다 때렸소? 날 잘 보시오. 내가 안악골 호랑이 김익두요. 그러자 한번만 살려주세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했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형님이 받았소이다. 내가 오늘 살려줄 테니, 진짜 살려줄 테니, 날 따라오시오.” 그를 부흥회에 데려갔대요. 나중에 그 사람도 예수님 믿고 장로가 됐다는 기록이 있어요.

성령세례 받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도 없어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생겨요. 성령세례 받고 거듭난 사람은 신분의 변화와 함께 삶의 변화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미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 신분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계속 노력하는 게 이 세상에 살면서 거듭난 사람답게 계속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계속 우리는 그렇게 성화의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10절부터 12절까지 우리 같이 읽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거듭난 사람은 신분이 바뀌어요. 하나님 자녀로 신분이 바뀌어요. 신분만 바뀌는 게 아니고 삶의 변화도 따라와요. 성령님이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거듭난 사람, 하나님의 자녀와 거듭나지 못한 마귀의 자녀는 무엇이 다를까요? 거듭난 자녀,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할 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사랑이 없으면, 사랑할 줄 모르면 내가 거듭난 사람인가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귀의 자녀, 마귀의 자식들은 사랑할 줄 몰라요. 왜 마귀는 이간질쟁이기 때문에 마귀는 사랑이 있는 곳을 깨뜨리는 게 마귀가 하는 임무예요. 참소자, 훼방자, 이간질하는 자가 마귀라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신분이 거듭나서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돼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요한일서 49절도 같이 읽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이 나를 살려주신 것처럼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살리려고 해요. 마귀의 자녀는 죽이려고 해요. 이간질해서 죽이려고 해요. 그게 차이예요. 거듭난 사람은 마땅히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픈 사람 살리고, 상처 입은 사람 살리고,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살리고, 내 생각에 동참해 주지 않는 사람도, 나와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사람도 살리고, 부족한 사람도 살리고, 꼴 보기 싫은 사람도 살리고, 다 살려야 돼요. 평생 살아도 원수 같은 남편도 살리고, 평생 살아도 내 마음 몰라주는 내 아내도 살리고, 어릴 적 상처를 나에게 많이 준 부모님도 용서해 살려 드리고, 아직 철없는 자식들도 살려 주고, 여러분 올해 다 살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게 거듭난 사람이 추구해야 될 마땅한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시간, 공간, 인간, 이 세 단어는 우리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죠. 우리 인생과 뗄 수 없는 단어인데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 이 세 단어는 같은 글자를 공유해요. ‘사이 간()’ 자를 공유해요. 인생이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의 문제예요. 인생이란 내가 몸담고 거주하는 내가 다니는 공간과 공간 사이를 무엇으로 채우느냐의 문제예요. 인생이란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무엇으로 채우느냐의 문제예요. 여러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시간과 공간, 인간 사이를 오직 하나, 사랑으로 채우셨어요. 그래서 다 살려주셨습니다.

벌써 2025년 새해 둘째 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공간으로 우리가 다니게 될 거예요.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인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과 공간, 인간 사이를 우리는 무엇으로 채울까요? 올 한 해 우리 좀 더 사랑으로 채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귀는 미움으로, 원망으로, 시기심으로, 질투로 채우게 해서 이간질해서 다 죽게 만들어요. 마귀는 분별하여 물리치고 예수님만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거듭난 사람답게, 위로부터 난 사람답게 진실로 더 예수님을 닮은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 때문에 올 한 해 내 부모님이 많이 웃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 때문에 내 자녀들이 많이 웃고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나 때문에 내 남편이 많이 웃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 때문에 내 아내가 많이 웃고 행복해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 때문에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웃고 행복해질 수 있기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기를,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번호
  •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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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  거듭나야 합니다(요한복음 3:1~8)
  • 2025-01-12
  • 박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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