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로마서 4장 1-13절)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로마서 4장 1-13절)
율법은 죄를 죄로 알게 하는 초등교사요 몽학선생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결국 율법은 인간을 메시야 앞으로 이끌어 인도합니다. 그렇지만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이방인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죄인 된 인간 스스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받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메시야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이것이 칭의의 교리입니다.
로마서 4장 4절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내가 죄 사함 받고 내가 의롭게 된다면 도대체 나는 얼마나 많이 노력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가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면 우리는 아마 영원토록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죄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은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이나 보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의롭게 된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내가 일한 것에 대한 보수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그것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죄 사함을 받을 수도 없고 구원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로만 됩니다.
로마서 4장 5절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죄로 타락한 인간은 누구라도 자기 스스로의 행함으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비록 경건하지 아니한 자라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의롭다 하십니다. 비록 충성한 것도 없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라도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이신칭의입니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은총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신칭의입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면 나의 구원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나의 구원은 항상 불안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구원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의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함으로 내가 구원받는다면 나는 나의 구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아는데 그렇다면 나의 구원은 불안합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화목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단번에 대속의 제물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지성소로 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령님이 감동하시는 사람은 이 복음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입은 거룩한 성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크신 경륜 안에서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다면 범사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의 자존심은 율법과 할례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할례받은 족속이라는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졌다는 사실을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받은 자기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토라도 없고 할례도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 로마서 4장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생각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바르게 깨우쳐 줍니다. 구원에 관한 올바른 도리를 선언합니다.
로마서 4장 6절부터 8절까지 말씀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지금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다윗 왕을 그리워합니다. 유대인들의 자랑은 다윗 왕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다윗 시대를 그리워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의 영원한 자랑거리인 다윗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다윗을 내세워 구원의 도리를 설명합니다. 다윗이 율법을 다 지켰느냐? 질문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도 율법을 다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율법을 어기고 밧세바를 취하고 간음죄를 범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다윗도 자신의 불법이 사함을 받기를 그렇게도 소망했고 다윗도 자신의 죄가 가리어지기를 바라고 소망했다는 것입니다.
시편 32편 1절에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지금 바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유대인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너희 유대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다윗이 무슨 고백을 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고 말했다. 다윗도 율법을 다 지키지 못했고 다윗도 자기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실례로 들어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율법을 다 행함으로 복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토라를 가졌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행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바울은 계속하여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윗에 이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자랑하고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자신들은 할례받은 백성이기에 선민이요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그런 생각을 뒤집어엎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여 들으라.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자랑거리로 여긴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할례시에 되었느냐 무할례시에 되었느냐? 이것을 잘 생각하여 보라. 그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때는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전입니다. 할례 제도가 있기도 전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7장 10절에 말씀합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의 일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여종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할례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을 때의 나이는 99세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여종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나이 13세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나이 85세 경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 제도를 주시기 이전에 되어진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할례시에 된 것이 아니고 무할례시에 할례를 받기 이전에 되었다는 사실을 바울이 지금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논리는 아주 명쾌합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 말씀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행함으로 그것으로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예수님은 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 부활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아주 뻣뻣해집니다. 몹쓸 사람이 됩니다. 바리새인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못 씁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뻣뻣한 사람 되지 말고 교만한 사람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답게 나의 공로를 자랑하지 말고 나의 공로를 내세우려고도 하지 말고 진실로 겸손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릴 줄 아는 성도 되어야 합니다.
인도에 마하 쿰브 멜라(Maha Kumbh Mela)라는 축제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의 축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경전에 의하면 암리타라는 신비한 영약이 들어있는 주전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과 악마들이 그 신비한 약이 들어있는 주전자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그 신비한 약이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이 만나는 지점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을 성스러운 강으로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이 아무리 차가워도 그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쿰브 멜라 축제는 열릴 때마다 무려 1,100만 명 이상이 물에 뛰어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물이 자신들의 죄를 씻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열심을 막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갠지스 강에서 몸을 씻고 죄사함 받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쿰브 멜라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강물에 몸을 씻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깨어진 유리 조각 위를 걸어갑니다. 발에서 피가 흐르지만 그것을 참고 견딥니다. 어떤 사람은 뜨거운 숯불 위를 걸어갑니다. 발이 화상을 입고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그것을 참고 견딥니다. 어떤 사람은 칼로 자기의 몸을 찌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죄를 씻고 신들의 분노를 달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뜨거운 태양을 계속 쳐다봅니다. 자기의 눈이 멀어 장님이 될 때까지 쳐다봅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서 고통을 참고 견딥니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고행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선교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종교는 무언가 행위를 요구합니다. 인간 편에서 인간 스스로의 노력이나 고행이나 수행을 요구합니다.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 속전을 바치거나 인간 스스로 무슨 대가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은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그는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진 유리 조각 위를 걸어가면서 발에서 피가 흘러도 참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숯불 위를 걸어가면서 발에 화상을 입어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로 자기의 몸을 찌르면서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태양을 계속 쳐다보면서 스스로 눈이 멀어 장님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서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죄 사함을 받을 수도 없거니와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상명령으로 선교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교하는 성도 선교하는 교회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에도 무속인이 80만 명이 넘습니다. 실제로 신당을 차려놓고 활동하는 무속인이 50만 명이나 됩니다. 무속인을 찾는 사람들은 부적을 집에 두고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비싼 굿을 합니다. 현대인들이 무당을 찾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미래가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 해결책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몸에 지니고 무언가를 실행하면 문제가 해결될 줄로 압니다. 여러분은 부적 같은 것을 의지하는 사람 아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믿음 안에서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아 갈 수도 없는 참된 평화 샬롬의 은총을 누리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다 우상 숭배입니다. 헛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썩어져서 없어집니다. 사람 눈에 보이고 사람 손에 잡히는 것들은 신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썩어져서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은 우상입니다. 죄인 된 인간의 눈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귀합니다. 사람이 누리는 복 중에 가장 귀한 것이 믿음의 복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힘입어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가장 귀한 복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귀한 복 믿음의 복을 받은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영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의 영혼을 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먼저 도덕적 행동을 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응답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먼저 도덕적 행동을 하면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다. 이것이 당시 독일의 신학이었습니다. 루터 자신도 매일 금식하고, 매일 일곱 번 기도하고, 매일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철야기도하고 매일 고해성사를 하면서 행함으로 거룩함에 이르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루터는 매일 자신의 죄악 된 본성이 살아 있음을 보면서 스스로 실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는 로마로 갑니다. 산타 스칼라 성당의 28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서 올라갑니다. 무릎으로 기어서 올라가면 고행을 하면 깨달음을 얻고 거룩해질 수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순간 알게 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루터는 1516년에 로마서를 가르치던 중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읽고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의 구원을 깨닫게 됩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 종교개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 구원의 진리는 인류를 살리는 유일한 구원의 진리입니다. 유일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북경에 있는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중국 지방신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치는 분들이었습니다. 다들 신실하신 분들이었고 겸손하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이미 중국교회에 뛰어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중국 대륙 멀리서 2박 3일 동안 기차를 타고 오신 분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순수한 열정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설교해야 합니까? 그분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예수 지두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설교할 수 있을까? 오직 거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설교하면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까? 그런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 지두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설교할 수 있을까? 거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보면서 제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기복신앙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상급신앙 번영신학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큰 교회에 대한 욕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중국 대륙 이 넓은 곳에 나를 어디로 보내시든지 지하교회 어디서든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만 전하다가 죽고 싶습니다. 필요하다면 나는 무슬림 지역으로도 들어가서 예수 지두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그런 말을 들을 때에 저는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 지하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는 바로는 1억 명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국은 지금도 마음에 안 드는 교회는 강제로 철거하고 폐쇄해 버립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핍박받는 곳에서 복음이 더 왕성하게 살아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너무 편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이 소중한 구원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취급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얻는 의를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철저히 고난 당하신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제일 잘 믿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제일 잘 믿는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우리가 지켜가기를 바랍니다. 오직 성경,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가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다윗이 율법을 다 지켜 행하는 것으로 의롭게 되었나요?
2.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할례시입니까? 무할례시입니까?
3. 칭의(稱義)의 교리를 설명해 보십시오.
칭의의 열매(로마서 5장 1-11절)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로마서 4장 1-13절)
복음과 율법(로마서 3장 19-31절)